영상번역의 비전과 단가에 대해 - 영화번역가 황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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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번역의 비전과 단가에 대해

영상번역의 비전과 단가에 대해

개봉관 번역 시장과 케이블, IPTV 번역 시장은 전혀 별개이기 때문에 아래 글은 제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케이블 번역계에  7~8년 있었던 입장에서 요즘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어 한번 정리해 봐요.

요새 영상번역에 관심을 갖는 분들이 부쩍 늘어서 인력 공급도 많이 늘었고, 넷플릭스 상륙으로 케이블 초창기의 미드 붐처럼 영상번역 시장에 일량이 쏟아지다시피 해서 영상번역가에 대한 수요도 커졌어요. 넷플릭스와 비슷한 구글, 훌루 같은 플랫폼도 한국 시장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는 걸 보면 수요는 더 커질 가능성이 있어요. 영상번역을 업으로 삼는 분들에겐 어쩌면 이게 시장을 제대로 살릴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몰라요. 차근차근 적어 볼게요.

우선 현재 영상번역 시장은 망가질대로 망가진 상태예요. 각 IPTV와 케이블로 들어가는 미드 물량은 하청의 하청을 반복하면서 여러 업체가 수주 단가를 헐값에 덤핑 치는 바람에  멀쩡한 업체들은 다 무너졌어요. 저렇게 헐값에 수주해도 업체 입장에선 남는 장사예요. 번역가에게 그만큼 덜 주면 되니까요. 이런 사이클로 번역가가 착취의 대상이 된지 꽤 됐어요. 그나마 양심 있는 업체들과 신뢰를 쌓고 일하는 소수의 베테랑 번역가들이나 적당한 단가를 받으며 비교적 안정된 수입을 올리고 있죠.

이렇게 착취 구조로 고착화 된 시장이 조금 들썩이기 시작한 건 넷플릭스의 물량이 해외를 통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예요. 물량이 해외에서 바로 오기 때문에 아직까진 한국의 악덕 업체들이 넷플릭스나 넷플릭스 벤더들에게 덤핑 단가를 제시해서 수주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아요. 일단 그쪽에 선이 닿아야 하는데 그게 어렵거든요. 그래서 해외에서 들어오는 물량은 한국에 비해 비교적 단가가 높은 편이에요.

다행인 건 현재 넷플릭스의 많은 물량을 소화하고 있는 업체가 양심적인 곳이라는 거예요. 비교적 높은 단가에 수주해서 좋은 번역가들을 골라 한국 최고 수준의 단가를 주고 있죠. 지금 한국에서 어느 정도 경력 있고 케이블, 공중파, 영화제 쪽 영상번역계에서 이름깨나 있다 하는 분들은 대부분 그쪽에 있다고 보셔도 돼요.

 

문제는 슬슬 해외 업체에 낮은 수주가를 제시해서 물량을 따오는 한국 업체들이 생기고 있다는 거예요. 뭣도 모르는 해외 업체는 그저 수주가가 싸니까 물량을 던져줍니다. 궁극적으로 봤을 땐 해외 클라이언트 측의 QC(quality control) 과정에서 걸러지고 그쪽에 다신 물량을 주지 않는 상황이 비일비재해요. 그래도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면 수주가가 워낙 싸기 때문에 수익을 거둔 후에 치고 빠질 순 있죠. 위에도 말씀드렸지만 수주가를 그렇게 싸게 받아도 돼요. 번역가에게 덜 주면 되니까요. 국내 영상번역 시장에 만연한 양아치 사이클이 해외 시장으로 번지는 현상이죠. 결국 또 번역가들은 착취를 당합니다. 이런 곳의 번역 단가는 편의점 시급도 안 되는 수준이에요. (간혹 올라오는 넷플릭스 자막 컴플레인 글들의 대부분은 이런 업체에서 번역한 것들인 경우가 많아요. 아예 번역기 수준의 자막이 올라오는 경우도 있죠.)

여기서 당황스러운 사실은 양심 있는 업체가 물량을 높은 가격에 수주해서 높은 단가에 좋은 번역가를 쓰고 남기는 이윤보다, 악덕 업체가 헐값에 물량을 수주하고 비상식적인 단가로 번역가를 착취해 남기는 이윤이 훨씬 크다는 겁니다. 뭔가 이상한 상황이죠.

그렇다면 번역가들이 취해야 할 행동은 현재 시장을 가급적 냉정하게 평가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좋은 업체를 찾는 거예요. 물론 좋은 업체에서 경력도 없고 실력도 모자란 사람을 쓰진 않겠죠. 제가 말씀드리는 건 경력이 적고 실력이 모자란다면 더 노력해서 좋은 업체와 일할 수 있도록 실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고, 경력도 많고 어느 정도 실력이 되신다면 나쁜 업체에 있지 말고 꾸준히 좋은 업체를 뚫으라는 거예요. 지금 받는 단가가 후진 단가인지, 이 업체가 양아치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정보 수집력이 필수죠. “어딘지 가르쳐주세요”처럼 무책임한 말이 없어요. 본인이 뛰고 있는 필드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모르면 끝까지 이용만 당하는 수밖에 없죠. 시장 조사를 꾸준히 하고, 동료 번역가들을 만들어서 정보를 나누고, 필요하다면 힘을 합치고. 프리랜서로 살아남으려면 실력과 시장 개척 능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양심적인 업체에 좋은 번역가들이 몰리고 악덕 업체를 도태시켜서 번역가들이 좋은 대우를 받는 시장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닙니다. 해외에서 들어오는 물량들은 아직 국내에서 돌고 도는 바닥 단가 시장처럼 고착화 되진 않았으니 아직은 가능성이 있어요. 이 일을 평생의 업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은 시장의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셔야 합니다. 단기적인 이익만 보면서 일을 해주고 해주고 하다 보면 또 금세 양아치들만 판치는 시장이 되고 말 거예요.

 

지금 상황에서 좋은 번역가는 어딜 가도 환영 받습니다. 악덕 업체들은 물론이고 양심적인 업체들마저 좋은 번역가가 부족해 허덕입니다. 좋은 번역가들도 일이 없어 전직을 고민해야 했던 얼마 전에 비하면 아주 다행인 상황이죠. 저도 번역 경력이 11년차지만 요즘처럼 업체들이 좋은 번역가를 재산으로 생각하는 상황은 본 적이 없어요. 등쳐먹을 상대로 생각하느냐, 파트너로 생각하느냐의 차이지 좋은 번역가는 업체에겐 귀한 재산이에요. 해외 클라이언트들은 번역질을 따지기 때문에 꾸준히 일을 수주하려면 좋은 번역가를 써야 하거든요. 아무리 업체에서 앓는 소릴 해도 내가 받는 단가가 많이 낮다면 업체는 먹고 살만합니다. 번역가들 피 빨아서.

번역가들에겐 호기일 수도 있어요. 이 기회를 잘 활용하셔서 좋은 업체들을 키우시고 부디 건전한 시장에서 오래오래 좋아하는 일 하시길 저도 바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