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투 비 블루 - 번역 후기(스포 포함) - 영화번역가 황석희
9027
post-template-default,single,single-post,postid-9027,single-format-standard,ajax_updown_fade,page_not_loaded,,vertical_menu_enabled, vertical_menu_transparency vertical_menu_transparency_on,qode_grid_1300,side_area_uncovered_from_content,qode-content-sidebar-responsive,transparent_content,qode-theme-ver-12.0,qode-theme-bridge,wpb-js-composer js-comp-ver-4.12,vc_responsive

본 투 비 블루 – 번역 후기(스포 포함)

본 투 비 블루 – 번역 후기(스포 포함)

<본 투 비 블루>는 제작 소식을 들으면서부터 설렜던 작품이에요.  챗 베이커 팬이거든요. 갖고 있는 재즈 앨범 중에서 가장 많이 듣는 뮤지션이에요. 음악 편식이 심한지라 재즈는 오스카 피터슨, 챗 베이커 이렇게 둘을 거의 들어요.  그러니 영화가 나온단 소식이 들릴 때부터 설렐 수밖에요.

<본 투 비 블루>는 영화가 정적이라 대사도 그리 많지 않아서 크게 어렵진 않았어요. 물론 가사를 번역하는 건 언제나 어려워요. 자막으로 나가면 가사와 영화 내용이 관련된 경우가 많으니까요. 자막을 넣지 않으면 관객이 배우의 표정과 노래를 온전히 감상하실 수 있지만, 자막이 있으면 아무래도 배우를 보기가 어렵죠. 그렇기 때문에 그 멋진 경험을 포기하고 자막을 보게 만들 때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경험을 드려야 해요. 그래서 가사를 쓴다는 게 참 부담스러운 작업이기도 해요.

사실 이 작품은 대본의 상태가 아주 안 좋았어요. 해외 제작사에서 대본 만드는 회사에 따로 의뢰를 해서 대본이 나오는 게 보통인데 아무리 해외에 있는 회사라도 해도 회사에 따라 대본의 질이 천차만별이에요. 딕테이션에 의존해 대본을 만드는 곳도 많은데 아시아인보다 못 듣는 경우를 종종 봐요. 너무 엉뚱하게 써놓는다는 거죠.

And he came over and we played “Toot Toots”
and we played “Cheryl”, and “The Song Is You”

‘투 툿츠’와 ‘셰릴’, ‘송 이즈 유’를 같이 연주했다.

이런 대사가 나와서 “Toot Toots”란 곡을 미친듯이 찾았는데 죽어도 없더군요. 얼추 비슷한 곡은 있는데 챗 베이커의 곡도 아니고 이때 같이 연주했다던 찰리 파커의 곡도 아니고… 결국 이건 감독님께 여쭤봐서 알았어요. “Toot Toots”이 아니라 그냥 “Two tunes”인데 대본이 잘못 나왔을 거라고 하시더군요. 그냥 ‘두 곡’이라는 뜻이에요. “‘셰릴’과 ‘송 이즈 유’ 두곡을 연주했다”가 되는 거죠.

“Embouchure”(관 악기를 입으로 무는 방법) 같은 중요한 단어도 대본엔 그냥 “options”으로 적혀 있었어요. “앰뷰셔”를 “옵션”으로 듣고 대본에 그렇게 적어 놓은 거죠.

“Like what Chekhov said”라고 나와야 할 대사는 대본에 “Like a Chekov set” 같은 말도 안 되는 문장으로 적혀 있었고요.

이런 것들 때문에 초반엔 아예 번역이 불가능한 문장이 많았어요. 힘들다고 영화사에 징징대긴 했는데 이런 경우는 영화사에서도 딱히 방법이 없어요. 대본을 새로 만들어 올 순 없거든요. 번역가가 어떻게든 듣고 알아서 하는 수밖에.

그래서 로버트 뷔드로 감독의 시나리오를 요청해서 대본과 시나리오를 일일이 대조해 가면서 작업했어요. 대본과 시나리오가 많이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시나리오에 있는 용어들은 제대로 된 것들이니까요. 시나리오에도 없는 대사는 수십 번을 돌려듣고 도저히 안 들리면 외국인 친구에게 들려주고 생난리를 치면서 작업했어요. 쓰다보니 울컥…ㅠ

모니터링 시사를 마치고 마지막 공연 장면에서 챗이 마약 했다는 걸 제인이 어떻게 눈치챘는지에 대한 단서가 부족하다는 피드백이 있었어요. 묻는 관객 분들이 계셨다고. 저는 제인이 그저 느낌으로 알아챘다고 생각했거든요. 별다른 단서가 없어도 되겠다 싶었는데 단서가 부족하다 느낀 관객 분들이 있다 하셔서 알려드릴 방법을 찾아봤어요. 영화사 측에선 전주국제영화제 때문에 내한하셨던 로버트 뷔드로 감독님께 따로 여쭤봐 주셨고요. “Toot Toots” 문제도 이때 여쭤봤어요.  감독님이 대본 보내라고 오류가 있는 부분 수정해 준다 하셨다는데 한두 군데가 아니라서 대본을 통째로 교열을 봐주셔야 할 거라… 차마 못 드렸어요 -_-

감독님은 챗이 손으로 얼굴을 훑는 동작이 마약을 했다는 증거라고 하셨어요. 그게 단서라고.  그 전에 제인이 챗에게 하는 말이 있거든요. ” No, I see you scratching your face like that again”(또 얼굴 긁으면 마약 한 줄 알 거다) 이게 단서가 되는 거죠.

저는 사실 그것보다 그 동작을 하는 순간의 가사가 결정적인 단서라고 생각했어요. 제인이 듣고서 눈빛이 달라진 순간의 가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So please forgive.
그러니 용서해줘요

this helpless haze I’m in.
무력하게 껴안은
이 몽롱함을

지금 챗은 자기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몽롱함(haze)에 빠져 있는 상태거든요. 제인에게 이 어쩔 수 없음(helpless)를 용서해 달라는 말이에요.

원안은 “이 주체 못할 어지러움을“이었어요. 그런데 모니터링 시사를 마치고 보니 이걸 단서로 못 느끼시는 것 같아 조금 더 의미를 강조한 거죠.  원래는 ‘몽롱함’이라는 단어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서 대안을 여러가지로 냈었어요. ‘이 주체 못할 아득함을’, ‘주체 못할 어지러움을’.  그러다 결국은 좀 더 직설적인 단서를 드리기로 하고 ‘몽롱함’을 쓰게 됐어요.

정말 애처로운 장면이에요. 영화를 통틀어 챗이 가장 이해되던 장면이기도 하고. 이 영화는 블루레이로 나온다면 두고두고 볼 것 같아요. 기회가 되면 상영관에서 다시 보고 싶어요. 아직 못 보신 분들은 얼른 찾아서 보세요. 어둑어둑한 저녁쯤 보시면 훨씬 감흥이 좋을 것 같아요.

마지막은 저 가사가 들어 있는 곡을 링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