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풀 - 번역 후기 - 영화번역가 황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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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풀 – 번역 후기

데드풀 – 번역 후기

사실 인터뷰에서 너무 많이 떠들어서 데드풀 번역 관련 이야기는 쓸 게 별로 없어요. 그래서 이번 글은 데드풀 번역 후기라기보단 많은 분들께 고마움을 전하는 글입니다. 쓰다보니 글이 엄청나게 길어요. 화장실에서 보시면 다리에 쥐납니다.

 

처음 데드풀 번역 의뢰를 받았을 때 들뜨면서도 막막했던 희한한 기분이 아직까지 생생해요. 막상 들떠서 받고 나서는 내가 번역할 깜냥이 되는지까지 생각해 봤거든요. 사실 영화 규모보다 번역 자체가 걱정돼서 겁이 좀 났어요. 데드풀이란 놈이 어떤 놈인지 이미 알고 있던 상황이라.

이번 데드풀 자막은 번역가의 시각에서 보면 잘한 번역이라고만 볼 순 없는 자막이에요. 직역도 많고, 문법 파괴적인 자막도 많고, 음차를 써버린다거나 하는 괴상한 시도도 있고. 제가 번역가 입장에서 다른 번역가가 이렇게 작업한 걸 봤다면 눈살을 찌푸렸을지도 모르겠어요. 프로 번역가들이 생각하는 ‘좋은 자막’과 관객들이 생각하는 ‘좋은 자막’엔 괴리가 조금 있거든요. 저도 물론 ‘좋은 자막’의 내적, 외적 기준이 있긴 한데 요즘은 그 생각이 조금씩 깨져요. 단순히 생각해서 관객들이 좋아하는 자막이 좋은 자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서요. 어쨌든 영화의 주인은 관객이니까요. 관객들이 좋아하는 자막 유형이 있는데 굳이 “아니야, 전문가가 봤을 땐 여러모로 이게 좋은 자막이야.”라고 스타일을 강요하는 게 옳은 것인가도 생각하게 되고.

사실 데드풀도 제 번역 스타일과는 거리가 조금 있어요. 그런데 워낙 좋아해 주시니까 개인적으로도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앞으로 다른 작품들을 작업하면서도 계속 고민해야 할 문제 같아요. 관객들의 기호는 계속 바뀌고, 문화와 언어 이해 수준은 점점 올라가는데 제 스타일만 고집하고 있을 순 없거든요.

 

번역이 이슈가 되다 보니까 작업 외적으로도 찾는 곳이 많아져요. 심지어 방송 출연 섭외도 몇 건이 들어왔는데 모두 고사했어요. 인터뷰도 씨네21을 마지막으로 모두 고사했고요. 사실 씨네21 전에도 필요 이상으로 많이 해서 씨네21 인터뷰도 고사했었는데 거듭 연락을 주셔서 제가 뭐나 된다고 자꾸 빼나 싶어서 마지막으로 했어요. 방송이며 강연, 출판이며 전부 고사하는 건, 이렇게 이슈가 되는 것도 반짝하고 지나간다는 걸 알기 때문이에요. 좋다고 여기저기 다 찾아다니고 작업 외적인 일들로 바쁘면 정작 제 일엔 집중을 못 할 거 같아요. 제가 잘나서 튕긴다거나 뻐기는 게 아니니까 오해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오히려 그 반대예요. 제가 뭐나 된다고 자꾸 찾으시나 싶고, 그런 자리에 나설 주제가 안 된다고 생각해서 정중히 고사하는 거니까요. 저는 그냥 뒤에서 평생 관객들과 영화로 덕질이나 하고 조용히 번역하며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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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영화 정보 데드풀 평점을 보면 첫 번째 베스트 댓들이 번역가 상 주라는 글이에요. 관객 분들은 저게 번역가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체감이 안 되실 거예요. 정말 손이 벌벌 떨릴 정도로 좋아요. 번역가는 늘 영화 뒤에 숨어 있는 존재라 번역이 언급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고, 언급된다고 해도 긍정적인 얘기보다 부정적인 얘기를 많이 듣는 게 당연한 직업이거든요. 베스트 댓글에 저런 글이 올라왔다는 건 정말 평생 간직할 상이에요. 번역가에게 저것보다 큰 상은 없어요. 혹시나 쓰신 분이 삭제하실까봐 공감 갯수가 올라갈 때마다 스샷을 찍고 또 찍고. 되게 촌스럽죠? 아주 큰 확률로 짐작하건데 평생 이런 경험은 다신 못 할 거예요. 수많은 우연이 겹친 행운 같던 작품이라 이런 흔치 않은 대사건은 꼭 간직하고 싶은 거죠. 그만큼 의미가 크고 소중한 경험이에요. 물론 옆에 비공감을 주신 분들의 숫자도 늘 보면서 고민해요. 어떻게 하면 저 관객 분들도 만족하실지. 어쨌든 이렇게 큰 상을 주시고 큰 관심을 보여주신 많은 관객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저는 번역을 10년 넘게 했지만 아직 개봉관 필모가 그리 많지  않아요. 앞으로 갈 길이 먼 영화 번역계 루키죠. 그래서 초반에 이렇게 좋은 평을 듣는다는 게 부담스럽고 겁이 나기도 하고 그래요. 데드풀에서 호평을 받은 건 사실 실력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 운과 우연이 겹쳐서예요. 솔직히 똑같은 기회가 있었다면 저보다 잘하셨을 번역가 분들이 많아요. 겸손이 아니라 실제가 그래요. 저는 겸손과는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거든요.

문제는 앞으로인데, 앞으로 필모가 많이 쌓여갈수록 혹평도 쌓이고 저를 싫어하는 분들도 많아지겠죠. 필모의 양과 비례해서 많아질 거예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번역은 없기 때문에 분명히 그렇게 되거든요. 제가 정말 잘해서 큰 비판이 없는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단순히 경력이 짧기 때문이죠. 비판이 쌓이는 건 필연이라고 봐야 해요. 그래서 지금 목표는 욕을 안 먹는 번역가가 되는 게 아니에요. 지금 목표는 훗날 많은 비판을 받게 되더라도 숨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고 반성하고 자양분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제 그릇을 넓히는 거예요. 롱런하려면 멘탈 강화가 반드시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은 이렇게 해도 욕 좀 먹는다고 숨어버릴지도 모르겠어요. 딱히 지금 멘탈이 튼튼한 인간이 못 되기 때문에.

아무리 꼼꼼히 한다 해도 데드풀에서도 실수가 많았고, 앞선 캐롤에서도 많았고, 다른 작품에서도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 거예요. 상영 기간 중엔 언급할 수 없는 사정들도 있지만 그런 실수들은 꼭 반성하고 자양분으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도 여러 루트로 피드백을 주시는 관객 분들께 감사드려요. 당분간 번역하는 작품들은 일부러라도 힘을 조금 빼고 번역하려고 해요. 관객들의 기대감이 큰 작품이다 뭐다 해서 부담을 가지고 하면 외려 자막을 망칠 것 같거든요. 괜히 뭐라도 보여줘야 할 것 같은 중압감에 오버할 것 같고… 지금껏 하던 대로 즐겁게 작업하고 최선을 다해 좋은 자막 내드릴게요.

전에도 드린 말씀이지만 데드풀이 영화에서 그런 말을 해요.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이고 행복은 짧은 광고와 같다. 이제 정규 프로그램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영화번역가에겐 관객의 무관심과 혹평이 정규 프로그램이고, 이런 큰 관심은 행복한 짧은 광고예요. 기적같이 찾아온 기분 좋은 짧은 광고. 이제 저도 정규 프로그램으로 돌아가야죠. 여러분들 덕분에 짜릿하게 행복한 광고 타임이었습니다. 좋은 작품 맡겨주신 20세기폭스와 약 빤 역대급 마케팅으로 번역가가 편히 무임승차하게 해주신 홍보팀, 영화를 좋아해주신 모든 관객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보여주신 관심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좋은 작품들로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