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 VS 영화 번역가 - 영화번역가 황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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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 VS 영화 번역가

알파고 VS 영화 번역가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이 흥하는 가운데 간만에 영화와 관계 없는 포스팅을 해봐요. 주변에서 이번 대결을 지켜보며 인공지능에게 가장 위협받을 직업군으로 번역가를 꼽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현직 번역가의 생각이 궁금하실까 하여 작성해 보는 뻘 글.

아래 글은 제 사견이며 다른 번역가 분들의 의견을 대표할 자격 따윈 없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인공지능이 번역가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무섭네요. 제 밥줄이 끊긴다는 얘긴데…. 지금도 구글 번역기를 위시한 각종 번역기들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성능이 좋고 발전 속도도 빨라요. 제 사견으론 언젠가 번역기가 번역가를 대체할 날이 오지 않을까 해요. 그런데 그 날이 그리 일찍 오진 않겠죠. 아무리 발전 속도가 빠르다 해도 지금 수준으로 보면 제가 번역하는 세대까지는 현 상태를 유지하지 않을까 싶거든요. 단순히 ‘발전 속도’만 보자면요.

컴퓨터 번역기와 비교해 인간 번역가의 장점을 나열하자면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굳이 이것저것 적을 것 없이 모두 아시는 것들이죠. 당연히 더 자연스러운 번역이 가능하고, 문맥을 파악하여 연결하는 넓은 시야를 갖추고 있고, 텍스트의 피상적 의미 파악에 그치지 않고 외연을 확장하여 표현하는 능력이 있고,  가장 중요한 위트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 등등. 이렇게만 따지면 컴퓨터 번역기는 죽어도 인간 번역가를 따라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인간 번역가의 장점에 대한 게 아니에요. 저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인간 번역가는 차츰 컴퓨터 번역기로 대체되리라는 거죠. 단순히 능력의 우월함 하나로 시장을 점유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시장은 여러가지 제약(시간, 자본, 접근성)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인간 번역가의 능력이 우월하기 때문에 번역기에 대체되진 않는다”라는 명제는 사실 시장에 대한 판단이 아쉬운 주장입니다.

 

지금도 기술 번역 시장에선 번역기로 초벌을 하고 사내에서 수정하는 케이스들이 드물지만 간혹 있습니다. 기술 번역이라 가능한 얘기라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문학, 영화 번역도 이런 예는 충분히 가능해요.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 영화사나  재제작 프로덕션의 경우 아주 싼값에 번역 회사에 영화 번역을 의뢰하고 사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수정하는 시스템을 쓰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으로 보면 번역기가 지금보다 더 발전한다고 가정할 때, 번역기가 내어놓은 결과물은 딱히 좋지 않아도(심지어 형편없더라도) 회사 내부에서 손보면 완성도를 올릴 수 있을 수준으로는 나오리라고 봐요. 제대로 된 번역가에게 맡기기 어려워서 이런 방식을 쓰는 회사들도 분명 생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런 예에선 컴퓨터 번역기가 번역가를 대체하는 거겠죠.

번역가가 컴퓨터 번역기로 통째로 대체되는 일은 먼 미래일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위와 같은 예로 번역가들의 시장이 좁아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니 더욱 경쟁이 치열해지겠죠. 번역료 덤핑 전쟁으로 공멸할 수도 있고 진흙탕 싸움이 싫어 번역계를 떠날 수도 있을 거예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는 저도 여러 동료 번역가들과 진지하게 오랜 시간 토론해야 할 것 같아요.

일단은 번역기로 대체할 수 없을 정도의 시장을 선점하고 고지를 사수하는 게 중요하겠죠. 결국 번역 능력을 포함해 여러 쓰임새를 갖춘 ‘시장성 있는 번역가‘가 답이 아닐까 해요. 클라이언트가 먼저 찾는 번역가가 돼야 살아남는 시장이 되리라 생각해요. 그러니까 일 쌓아두고 이런 뻘글을 쓰고 있을 때가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