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번역 후기 - 영화번역가 황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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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트라이트 번역 후기

스포트라이트 번역 후기

케이블 방송에 나가는 미드를 작업하던 시절 <뉴스룸 시즌1>을 번역한 적이 있어요. 드라마 세트 자체가 정신 없이 돌아가는 보도국이고 각본도 아론 소킨이라 그 무지막지한 대사량과 대사 속도와 난이도에 한숨을 푹푹 쉬던 작품이었어요. <뉴스룸>에서 그 고생을 하고도 <스포트라이트>는 제가 먼저 하고 싶다고 나선 작품이에요. <뉴스룸>을 번역하면서도 고생과 더불어 보람이 정말 컸거든요. 왠지 언론 정의를 위해 같이 싸우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들고. <스포트라이트>도 예상대로 고생스러운 작품이었지만 비슷한 류의 뿌듯함을 느낀 작품이었어요.

짐작은 하시겠지만 대사량이 좀 됩니다. 그렇다고 기겁할 정도로 많지는 않고 타 영화에 비해서는 많은 편이에요. 일단 작업하면서 물리적으로 대사량이 많아서 힘든 것도 있었지만 언론, 법률 관련 용어가 자주 나와서 정확히 쓰느라 애를 먹었어요. 법률 절차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자막을 써야 할 부분들도 있어서 힘들더라고요. 전에 <로앤오더>라는 미드를 스핀오프까지 포함해서 100편 이상 작업했어요. 거기서도 법률 용어가 정말 많이 나와서 어느 정도는 익숙한데 아무래도 제가 아는 대로 썼다가 낭패를 볼 것 같아서 확인이 필요했어요.

 

다행히 주변에 아는 기자님들과 변호사님이 계세요. 카톡으로 페북 메신저로 그분들 달달 볶아서 작업했습니다. 배경이 신문사다 보니까 직급이나 기자들이 쓰는 용어들을 현장감 있게 쓰고 싶었어요. 대본만 보면 조금 나이가 있어 뵌다 하는 사람들은 다 직책이 editor예요. -_-;; 그렇다고 죄다 편집장이라고 쓸 순 없거든요. 이런 것들 때문에 기자님들을 달달 볶았어요. 신문사에선 직급명들이 어떻게 되는지. ‘부국장대우’ 같은 명칭이 있다는 것도 처음 들었어요. 벤 브래들리가 정확히 말하면 이 ‘부국장대우’예요. 대본엔 직급이 정확히 나오지 않지만 실존 인물들이고 사건 당시 직책들이 위키에 남아 있기 때문에 알 순 있거든요. 자료실을 ‘서고, 서가’라고 부른다는 것도 여쭤봐서 알았고, 그외 현장감 있게 써야 할 표현들을 많이 여쭤봤어요. 기자 분들은 대부분 이런 직급보다 ‘선배’라는 호칭을 많이 쓴다고 하셨는데 자막에 그렇게 쓰진 못 했어요. 자막에 ‘선배’를 쓰는 걸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전에는 많이 쓰기도 했는데 요새는 갈수록 그게 어색하게 느껴져서 어지간하면 ‘선배’ 호칭은 안 쓰는 편이에요. 우리와 문화권이 다른 곳인데 굳이 그럴 게 있나 싶어서요.

 

법률 용어는 여쭤볼 게 훨씬 많았어요. 지금 얼추 봐도 메신저로 A4 두 장 분량 가까이 여쭤본 거 같아요. 이것저것 여쭤본 게 너무 많아서 다 말씀드리긴 힘들 것 같고 하나만 발췌해서 보여드리자면.

이렇게 질문마다 정말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셨어요. 이 외에도 굉장히 많은 법률 용어와 문맥들을 가르쳐주셔서 덕분에 법률 용어도 소위 있어 보이는 자막으로 만들어 넣을 수 있었어요. 기자님들과 변호사님이 없었다면 혼자 얼마나 X고생을 했을지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해요.

 

이런 전문 지식이 필요한 부분은 제가 완벽히 이해하지 못 하면 관객을 이해시키는 것도 사실 쉽지가 않아요. 제가 이해를 못 하고 쓰면 직역을 한다고 해도 관객들이 이해를 못 하는 경우가 더 많거든요. 그래서 번역에서 손 놓을 때까지 공부가 필요한 것 같아요. 세상 모든 전문 분야에 지인들이 있는 게 아니므로 -_-;; 위에는 어렵다고 징징대며 써놨지만 막상 자막은 이해하시기 쉽게 나왔어요. 내용이 조금 길거나 이해가 필요하다 싶은 부분은 자막 하나하나 찍어서 싱크를 늘려달라 따로 부탁드렸거든요. 번역가가 자꾸 싱크 가지고 찡얼대서 되게 귀찮으셨을 텐데 몇 번을 반복하면서도 열심히 예쁘게 잡아주셨어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영화가 정말로 좋아요. 번역가 나부랭이도 사명감을 느끼며 작업했을 정도로 언론 정의가 가슴 깊이 훅 들어오는 작품입니다. 혹시나 기자들 이야기라 복잡할 것 같고 지루할 것 같다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팽팽합니다. 영화 자체가 재미있어요. 여러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앙상블상, 각본상, 작품상을 수상하고 있을 정도로 연기와 각본, 재미 모두 이미 검증이 끝난 작품이에요.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대사들을 남깁니다.

 

이런 걸 보도하는 게
언론인입니까?

이런 걸 보도 안 하면
그게 언론인입니까?

 

* 혹시 전문 용어에서 오류가 발견된다면 그건 제가 따로 자문을 구하지 않고 작업한 부분에서 나온 실수라는 것을 밝혀둡니다.

Thanks to
태상준 기자님, ‘오마이 뉴스’의 이선필 기자님
법률사무소 ‘이제’의 유정훈 변호사님

맛있는 거 쏠게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