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 "flung out of space" 번역에 대해 - 영화번역가 황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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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 “flung out of space” 번역에 대해

캐롤 “flung out of space” 번역에 대해

익무에서 물어본 분도 계시고 트위터에서도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아서 이번 기회에 써봐요. 캐롤이 테레즈에게 첫 식사 때 “What a strange girl you are… flung out of space”라는 대사를 하고 나중에도 테레즈를 보며 “My angel, flung out of space”라는 대사를 한 번 더 하죠. 여기서 “flung out of space”가 대체 뭔 뜻인가…??;;;

저는 “하늘에서 떨어진”으로 번역했습니다만 작업 당시엔 이 문장에서 고민 정말 많았어요. “떨어진”이라는 게 어감이 로맨틱하지도 않고 너무 직선적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그렇다고 “하늘에서 내려온”이라고 쓰기도 싫었어요. “flung out of space”라고 하면 어디서 툭! 떨어진 뉘앙스거든요. 선녀처럼 우아하게 팔랑팔랑 내려오는 뉘앙스는 아니에요. 하늘에 있다가 어떤 우연적인 사건으로(타의라는 뉘앙스가 강하죠) 누구한테 떠밀렸는지 어쨌는지 어~~! 툭! 하고 떨어진 상황. 이런 걸 “flung out of space”라고 해요. 어제 트위터에서 아주 재밌는 글을 찾았어요. 자막 번역평을 모니터링하다가 찾은 건데 절 팔로우하신 분이 찾아서 링크해놓으셨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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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윗을 떠왔어요.)

 

 

 

무려 영화 <캐롤>의 각본가 필리스 나기의 트윗입니다. 러시아에서 캐롤 소설 번역 중인 번역가가 “flung out of space”의 뜻을 묻고 있는 트윗이에요. 여러모로 번역가들에겐 멘붕인 표현입니다. 예뻐 죽겠는데 어떻게 살리긴 어렵고 뜻도 애매한… 필리스 나기의 말에 의하면 “flung out of space”는 “외계인, 혹은 희귀한 새처럼 뭔가 특이한 것이 하늘에서 떨어진 상황”입니다. 작년 5월 트윗이던데 이걸 개봉하고 이제야 봤어요… (허탈…) @bhy5891 라는 분이 이틀 전 저 글타래를 찾아서 링크하셨더라고요. 어떻게 필리스 나기 트위터를 찾으실 생각을 하셨는지.(대단하십니다) 어쨌든 제가 파악한 뜻이 맞아 다행인 거죠. 틀렸으면 몰매;;

제가 알기로 소설 번역에선 “별에서 온”으로 쓰신 걸로 알아요. 저와는 접근 방식이 다르지만 그것도 재밌는 번역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이유로 익무 jimmylee님의 말씀처럼 “flung out of space”를 “일반 사람과 뭔가 다른 특이한 사람”으로 쓴다면 오역이란 얘길 들을 수도 있어요. 게다가 “What a strange girl you are… flung out of space” 이런 대사에서 그렇게 쓴다면 바로 앞 대사와(strange) 똑같은 표현을 한 문장에서 두 번 하게 되는 거죠. 한 작품에서 결정적인 대사는 전이든 후든 다른 대사, 혹은 단어와 연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캐롤>의 경우는 “flung out of space”와 “My angel”이 붙죠. 이런 경우라면 작가의 의도를 살려주기 위해서라도 ‘천사, 하늘’을 같이 써주는 게 좋습니다.

“My angel, flung out of space” 얼마나 예뻐요. 캐롤의 눈에는 테레즈가 하늘에서 우연히 자기 품에 툭 떨어진 천사처럼 보이는 거예요. 게다가 이렇게 신기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은 본 적이 없는 거죠. 작가가 대단한 거예요. “flung out of space” 한 문장으로 저 뉘앙스를 다 준다는 건. 어쨌든 이렇게 결정적인 대사를 번역할 때는 최대한 작가의 언어를 따라가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분명 뭔가 이유가 있어서 그런 뉘앙스의 표현을 썼을 텐데 그걸 멋대로 예쁘게 포장하는 건 아니다 싶기도 하고.

사실 이렇게 섬세한 영화는 한 문장, 한 단어를 쓸 때도 고민이 많아요. 가령 “What a strange girl you are” 같은 문장에서 “strange”는 “이상한, 희한한, 특이한, 기묘한 등등등”이 있겠지만 뭘 붙여도 마음에 안 들었어요. 뭔가 부정적인 뉘앙스가 느껴져서요. 결국은 ‘신기한’을 선택해서 붙였는데 이것 하나 고민하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어요. 저런 자막이야 1.5초면 훅 지나가 버리지만 의외로 고민해야 할 것들이 많아요.

 

참 많이 고민하고 만든 자막인데 개인적으로 마음에 안 드는 구석들이 몇 군데 있어서 많이 안타까워요. 맞춤법 하나 틀린 게 볼 때마다 민망하고, 개봉 후에 더 좋은 표현이 떠오른 대사들이 있어서 안타깝고 더 예쁘게 못 다듬은 대사가 있어서 아쉽고. 이런 것들이 있어서 개봉관을 여러 번 찾질 못 하겠어요. 그 부분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안 좋아서. 관객 분들은 거의 모르시겠지만 당사자 눈에는 스크린을 다 덮을 정도로 그 자막이 크게 보여요.

모든 작품이 개봉 후엔 필연적으로 이런 아쉬움이 있기 때문에 대범한 척 툴툴 털려고 노력 중입니다. 다음 작품은 더 좋은 자막 보여드릴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