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 - 번역 후기 - 영화번역가 황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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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 – 번역 후기

캐롤 – 번역 후기

제 얼마 안 되는 경력 중에 이건 꼭 제가 번역해야겠다고 영화사 붙들고 늘어졌던 작품이 몇 개 있습니다. <인사이드 르윈>, <와일드>, <맥베스> 그리고 <캐롤>. 그래서 특히나 캐롤은 애착이 많이 가요. 더 예쁘게 만들어주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죠. 상암에서 내부시사로 캐롤을 처음 보고 조르길 잘했단 생각이 백번도 넘게 들었어요. 이렇게 예쁜 로맨스가 다 있나 싶은. 게다가 그날 마침 눈이 왔어요. 눈발을 보면서 차를 몰고 일산까지 돌아오는데 작업하려고 컴퓨터를 켜는 순간까지도 가슴이 콩딱콩딱. 이렇게 가슴 뛰는 로맨스물을 본 지가 오래됐거든요. 한동안 이 정도로 마음에 드는 로맨스물이 없었어요.

 

캐롤을 번역하면서 가장 고민이 많았던 건 캐롤과 테레즈의 존하대.

 


작업을 마치고 얼마 후 올린 트윗이에요. 극중 인물이 나이 차이가 꽤 나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했는데 아무래도 캐롤만 말을 놓는 건 이상하겠다 싶었어요. 말을 놓는다면 또 어느 타이밍에? 트윗을 보다 보니 어떤 분은 캐롤을 cougar처럼 보는 게 더 심한 편견이 아니냐고 하셨는데 그 말도 맞습니다.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를 본 제 개인적 감상이 그런 판단으로 이어진 거니까요. 그런데 캐롤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캐롤의 눈빛이나 몸짓이 보통이 아닙니다. ‘마성’이란 단어가 바로 떠오를 정도로 사람을 홀려요. 저런 목소리, 저런 눈빛, 저런 몸짓으로

혼자 사니?

를 시전한다면 혼이 나가 버릴 겁니다. 물론 실제로 있는 대사예요. 영화에선 존대로 처리돼 있지만. 문제는 저렇게 반말로 쓸 경우에 캐롤이 나이와 연륜이 있다고 어린 여성에게 쉽게 수작을 거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는 거죠. 이 우아한 여성의 대사가 관객 눈에 조금이라도 저렴하게 비친다면 그건 영화를 번역한 제 탓입니다. 원문은 그런 뉘앙스가 없으니까요. 게다가 캐롤은 부와 사회적 위치, 결단력까지 모두 가지고 있는 상류층이고 테레즈는 점심 메뉴 하나 결정하기 힘들어하는 가난한 백화점 직원이에요. 여기서 캐롤이 하대를 하면 이 관계가 수직관계의 뉘앙스를 띨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캐롤의 자막도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아쉽고 안타까운 부분이 한둘이 아니에요. 아무리 공을 들였다 해도 다시 보면 부족하고, 고치고 싶은 곳이 보이고, 못 고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영화를 개봉할 때마다 늘 이런 심정이 반복됩니다. <캐롤>은 특히나 아끼는 작품이라 그런 마음이 더 커요. 저 단어는 뺄 걸, 저긴 조금 더 다듬어서 잘 읽히게 할 걸, 저기는 과감하게 의역해서 차라리 뜻 전달을 잘할 걸. 오히려 의욕과 애착이 과해서 덧칠이 많아지는 바람에 아쉬운 점이 많아졌어요. 그래도 촉박한 작업 일정 중에 최선을 다한 자막인만큼 부디 감상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블루레이가 발매된다면 출시사에 개인적으로 연락을 드려서 자막을 다시 한번 전부 손볼 생각입니다. 그땐 아무래도 한번 더 보는 자막이니 완성도가 조금 더 있는 자막이 되겠죠. 블루레이가 출시되면 그것도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2월 4일 정식 개봉을 앞두고 있어요. 우주대명작 캐롤 사방팔방 소문 내 주시고 부디 성적도 좋은 결과로 이어지길 빌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