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리오 (Sicario) - 번역 후기 - (살짝 스포) - 영화번역가 황석희
8371
post-template-default,single,single-post,postid-8371,single-format-standard,ajax_updown_fade,page_not_loaded,,vertical_menu_enabled, vertical_menu_transparency vertical_menu_transparency_on,qode_grid_1300,side_area_uncovered_from_content,qode-content-sidebar-responsive,transparent_content,qode-theme-ver-13.0,qode-theme-bridge,wpb-js-composer js-comp-ver-4.12,vc_responsive

시카리오 (Sicario) – 번역 후기 – (살짝 스포)

시카리오 (Sicario) – 번역 후기 – (살짝 스포)

드니 빌뇌브 감독 작품인 걸 알았을 때 기분이 좋았어요. <그을린 사랑>과 <프리즈너스>를 정말 좋게 봤거든요. 칸에서 이슈가  됐던 작품이라 기대하고 있던 차에 운 좋게도 제 품으로 떨어졌습니다. 이 작품을 받으면서 몸이 고생하진 않겠다 생각했어요. 전작들의 색깔로 보면 대사가 엄청나게 많다거나 메타포가 난무하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요. 역시나 생각보다 대사가 적었는데 오히려 그러니까 또 고민할 게 있더라고요. 대사가 적은만큼 중요한 장면에서 던지는 임팩트 있는 대사가 간간히 있어서요.

원래는 이 자막보다 10% 정도(?) 거칠었습니다. 비속어(지랄, 좆같은 등등)를 꽤 쓴 자막이었거든요. 에밀리 블런트의 말투는 그렇다치고 베니치오 델 토로나 죠슈 브롤린은 이 바닥에서 닳고 닳아 짐승 같은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이라 좀 강하게 쓰고 싶었어요. 물론 이렇게 쓰면 아무리 청불 작품이라도 대부분의 클라이언트 분들이 싫어하세요. 자막이 자극적이면 관객들이 싫어한다고. 그래서 피드백도 그런 의견이 왔었어요. 자막 수위를 낮추는 게 어떻겠냐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생각한 캐릭터 이미지에서 고운 말은 쓸 수가 없어서 떼를 좀 썼어요. 토막난 시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작품에서 대사가 순하면 보는 사람들은 이질감이 크다고. 다행히 의견을 존중해 주셔서 제가 썼던 자막의 수위를 사실상 거의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었어요. 정말 고쳤으면 한다는 부분 몇 곳만 제외하고요. 이럴 땐 참 감사하죠. 어쨌든 저는 비즈니스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 실익을 계산하는 실무자 분들의 생각과는 거리가 있거든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베니치오 델 토로의 대사예요. 알레한드로가 케이트에게 문서를 내밀고 서명을 하라고 하죠. 작전상 불법적인 행위는 전혀 없었다는 확인서. 케이트가 못 하겠다고 하자 권총을 케이트의 턱에 갖다 붙이면서 협박을 합니다.

 

You would be committing suicide…

자살을 당할 수도 있어요

 

사실 자살은 ‘당하다’라는 피동형을 붙일 수 없는 명사죠. 이 표현은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몇 개월 전 국정원 마티즈 자살 사고를 보면서 떠오른 표현이에요. ‘자살을 당했다’라는 표현. (이 부분은 논쟁의 여지가 있으니 여기까지만 말씀드릴게요) 그때 떠올라서 적어뒀던 표현이거든요. 아르헨티나에서 오래 사시다가 이제 한국에서 사시는 지인 번역가가 계세요. 최근에 이 분에게 들은 바로는 라틴아메리카엔 실제로 “Te van a suicidar(They’ll kill myself)” 이런 표현이 있다고 해요. 그런 사건들이 워낙 많아서 그렇다고.

드니 뵐니브 감독의 차기작은 블레이드러너 시퀄일 테니 아마 제가 작업할 가능성은 적겠고, 언젠가 꼭 이 감독의 작품을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요.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대사만이 아니라 음향과 화면이 정말 기가 막히게 시너지를 내는 작품입니다. 꼭 극장에서 보시길 추천합니다. 관이 얼마 남지 않아서 내리기 전에 꼭 보셨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