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베스 - 번역 후기 - 영화번역가 황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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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 – 번역 후기

맥베스 – 번역 후기

맥베스 트레일러를 보고 가슴이 쿵딱쿵딱… 굳이 제가 번역해야겠다고 조른 작품이에요. 셰익스피어 희곡이니 고생할 건 뻔한데 정말 너무 하고 싶더라고요. 셰익스피어는 대학시절 전공 시간에 자주 접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미 머리가 백지라 기억을 더듬어도 별로 건질만한 건 없었어요.(그게 아니라 딱히 공부를 안 한….) 그래서 작업 전에 맥베스를 구해서 미리 읽었습니다. 저는 총 세 권을 읽었는데요. 모두 전자책으로 읽었어요. 저는 외국 도서는 번역 상태가 좋지 않으면 그냥 안 보는 편이에요. 좋은 번역과 안 좋은 번역 얘기를 하려면 번역관부터 번역 철학까지 따져야 하는 내용이라 오로지 제가 싫어하는 형태만 말씀드리자면 ‘기계적으로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에요. 쉽게 말해 직역인데 저자의 숨결까지 옮겨야 한다는 목적으로 쉼표 하나, 문장 형태까지 원문과 거의 유사하게 번역하는, 이런 번역본을 만나면 아주 괴로워요. 읽히질 않거든요. 그래서 한 문장을 몇 번이나 읽어야 해서 그런 번역본을 만나면 그냥 패대기 치는 편이에요. 맥베스는 셰익스피어 희곡이니 훨씬 심하죠. 아무리 읽어도 이해 안 되는 문장들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결국 세 권이나 보게 됐습니다. 다행히 한 권은 만족할 만한 번역이어서 기억을 더듬기에 정말 좋았어요.

맥베스 시사가 시작되고 이런 평이 종종 보입니다.

맥베스 원작을 읽고 갈 걸 그랬어.

 

원작을 아는 상태에서 보는 것도 감상이 다르겠지만 제가 추천하는 건 원작을 영화 후에 보는 거예요. 이유는 저 아래 설명해 드릴게요.

솔직히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에 가장 짧은 작품이지만 맥베스 읽어 본 분들이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 시간 내서 읽어 보려고 해도 딱히 손이 안 가고. 그런 분들은 이 작품이 정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오디오북도 아니고 눈으로 보는 맥베스 원작이거든요. 마이클 패스밴더와 마리옹 꼬띠아르가 여러분 눈 앞에서 완벽한 맥베스를 보여줍니다. 평소 어려워 하던 고전을 접하는 데 이렇게 쉽고 좋은 기회가 있을까요?

이 작품의 대사는 맥베스 희곡 원작의 대사와 99.9% 일치합니다.(물론 연출엔 차이가 있어요. 사건 시간 순서라거나 시각 연출이라거나) 단수, 복수를 변형하거나 문장 순서를 바꾼 경우는 있어도 원문에 손을 댄 흔적이 없는 맥베스 그 자체예요.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지금껏 나온 맥베스 원작 기반의 영화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맥베스 기반 영화 중 가장 유명하고 제가 정말 좋아하는 ‘거미의 성’ 같은 경우는 각색이죠. 대사도 일본의 하이쿠 같은 운문이 아니에요. 그게 이번 작품과의 가장 큰 차이일 거예요. 이번 작품은 각색이 아니라 오리지널 희곡이거든요. 작품의 수준을 떠나 오리지널리티를 말하자면 이번 작품을 능가하는 맥베스 영화는 없습니다. 그 진한 원작의 냄새는 이 작품에겐 득이 될 수도 있고, 실이 될 수도 있는 선택이긴 합니다.

처음 대사를 접했을 때 조금 당황했어요. 영화로 옮겼다니 대사도 구어체로 바꾸지 않았을까 했는데 원문 그대로라니. 내가 할 깜냥이 안 되겠다 싶기도 했어요. 무려 셰익스피어 번역이니;;…….

갈등이 되긴 하더라고요. 그래도 스크린으로 옮겼는데 관객들이 쉽게 알아듣도록 구어체로 써야 하는 건 아닐까 하고. 그런 갈등을 작품 1/3 정도 작업할 때까지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진짜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대본을 보니까 이걸 구어체로 바꾸는 건 연출자의 의도와 거리가 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객들이 쉽게 알아듣게 하려면 연출자가 이미 그 전에 대본을 각색했겠죠. 최대한 오리지널리티를 살리고자 하는 선택이었을 거라고 믿고 저도 희곡투로 작업하기로 결심했어요. 제가 이걸 자의적으로 구어체로 바꿔 버리면 관객들은 연출자가 의도한 작품과 다른 작품을 보고 나가시는 걸 수도 있거든요.

저는 번역을 제 2의 창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생각하는 좋은 번역가는 충실한 전달자입니다. 대사가 아니라 작품 자체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번역하고 싶진 않거든요. 물론 이건 번역가 분들마다 번역관이 다르시니 무조건 제가 옳다고 할 순 없겠죠. 아무튼 영화사에도 그렇게 말씀을 드렸었는데 흔쾌히 동감해 주셔서 제 뜻대로 작업할 수 있었습니다. 의견을 교환하는 단계에서도 좋은 피드백들을 많이 주셔서 작업에 큰 도움이 됐어요.

 

이 영화를 보신 분들 중에 대사가 어렵게 느껴지신 분들도 많을 거예요. 희곡답게 방백도 워낙 많고… 그런데 감히 제가 판단하기로는 한 번에 대사가 눈에 쏙 들어오는 게 더 이상한 경우라고 봐요. 아무래도 고전 희곡이니까요. 게다가 구어체도 아니고. 이건 한국에서만 보이는 평이 아니라 영어권 국가에서도 종종 보이는 평입니다. “a major unexpected hurdle awaited me: without subtitles”라는 평이 보일 정도. 워낙 고어가 범벅인 작품이라 영어권 관객들도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최대한 알아들으시게끔 번역하려 노력했다는 겁니다.

 

1. 내 의도의 옆구리를 찌르는 박차는 오직 하나 치솟는 야심인데,
너무 높이 뛰어올라 건너편에 떨어지.

2. 내 계획의 옆구리를 찌르는 박차는 없고
날뛰는 야심만 있으니
자칫하다 반대편으로 낙마하기 십상이지.

 

1은 제가 읽은 세 권 중 A출판사의 원작, 2가 이번 작품의 자막입니다. 위 원작의 경우 저 형태만으로는 이해가 어렵습니다. 말이 산문이지 거의 운문에 가깝거든요. 2번과 같이 문장을 해체해서 관객들을 최대한 납득시키되 희곡투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게 이번 작업의 관건이었어요. 그렇게 하려면 일단 문장이 무슨 뜻인지 제가 완벽히 알아야 합니다. 그걸 이해하는 것도 장난이 아니었어요.(대학시절 셰익스피어 강의 잘 좀 들을걸…) 이 문장은 계획(의도)을 말에 비유한 문장이에요. 원문엔 나오지 않지만 박차, 날뛰다, 떨어지다 등에서 말이라는 심상이 떠오르죠. 1,2는 의미 이해 자체가 다른데 제가 이해한 뜻은 2에 가까웠습니다. 물론 여러 판본에서 확인도 했고요. no but의 해석을 두고 이런저런 논쟁이 있는 부분이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바꿨어도 아마 2번도 어렵다고 하실 거예요. 구어체가 아닌 이상 어렵게 보이셔야 정상입니다. 어려우신 감은 있겠지만 오리지널리티를 깨뜨리지 않는 선에서 관객들의 이해를 돕고자 최선을 다해 다듬은 문장들이에요. 두 번을 보고, 세 번을 보실 때 감흥이 다르실 겁니다. 영화를 보신 후에 관심이 생겨서 원작을 읽고 다시 보신다면 더 많이 보이실 거고요.

 

희극의 오리지널리티를 한계가 없는 스크린으로 그대로 가지고 온 작품이에요. 관객 분들은 스코틀랜드 전체를 세트로 하는 희곡을 보시는 겁니다. 지레 겁을 먹을 필요도, 원작을 미리 읽고 가실 필요도 없습니다. 영화의 줄기는 사실 그림만 봐도 아십니다;; 저야 자막까지 즐겨 주시면 좋겠지만. 자막 한줄, 한줄 너무 스트레스 받으시며 보실 것 없어요. 스토리 이해에 꼭 필요한 내용들은 오히려 쉽게 다듬어 놨습니다. 부디 두려워 마시고, 큰 화면에서 놓치지 말고 보세요. 감히 마이클 패스밴더의 인생 연기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어느 분이 그런 평을 하시더라고요. “맥베스 원작을 스크린에 쏟아부었다”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하얗게 불태웠….) 아쉬운 부분이야 많지만 더 좋은 자막 보여드릴 수 있게 쭉쭉 성장하겠습니다. 다음 작품에서 봬요. 여러분들이 펄쩍 뛸 좋은 작품들을 작업 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