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작의 주인 - 영화번역가 황석희
8254
post-template-default,single,single-post,postid-8254,single-format-standard,ajax_updown_fade,page_not_loaded,,vertical_menu_enabled, vertical_menu_transparency vertical_menu_transparency_on,qode_grid_1300,side_area_uncovered_from_content,qode-content-sidebar-responsive,transparent_content,qode-theme-ver-12.0,qode-theme-bridge,wpb-js-composer js-comp-ver-4.12,vc_responsive

내 유작의 주인

내 유작의 주인

 

yu

 

올해 여름 로카 아카데미에서 특강을 진행한 후 참석하셨던 분에게 이런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땐 나름 해 드릴 수 있는 조언을 해 드렸는데 며칠 전에 다른 분에게 똑같은 질문 메일이 하나 더 와서 글을 써 봅니다.

물어보신 대로 데뷔작이 유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 가정은 한국에 번역 업체나 영화 수입사가 단 한 곳이라는 조건 하에서만 성립합니다. 현재 일선에서 일하고 있는 번역작가들은 거절이라는 걸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고요. 그렇다면 과연 실제로 데뷔작이 유작이 된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요?

 

거절의 이유는 아주 다양합니다.

  • 실력이 부족해서 거절
  • 마감을 못 맞춰서 거절
  • 기존 번역 작가 풀이 있어서 거절
  • 단가가 안 맞아서 거절
  •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 거절

거절의 이유는 명확할 때도 있고 밑도 끝도 없을 때도 있지만 확실한 건 거절을 당하지 않는 번역작가는 없다는 거죠. 아직 실력이 미흡한 루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프리랜서로 살 작정을 했다면 거절 당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일상처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정말 준비가 안 된 형편없는 실력으로도 호기롭게 여기저기 지원해 볼 수는 있습니다. 당연히 써 주지 않겠죠. 운이 좋아서 거래를 튼다고 하더라도 실력이 형편없으면 한두 번 거래를 하다가도 더 이상 일을 주지 않습니다. 그럼 그냥 소주 한잔 드시고 내 실력이 부족했구나 하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후엔 부족한 면을 보완해 가면서 다른 클라이언트를 찾고 또 지원하고를 반복하면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 발전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이 길을 택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그건 번역작가만이 아니라 그 어떤 프리랜스 직업도 마찬가지예요. 대부분의 번역작가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연마됩니다. 무슨 슈스케 심사위원마냥 근엄한 의자에 앉아서 “당신은 데뷔할 준비가 되었다”라고 자격을 평가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거죠. 물론 경력이 좀 있는 번역작가들은 다른 번역작가들의 자막 5~6개만 봐도 얼추 실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땐 “잘한다, 못한다”가 아니라 어디서 소개 부탁을 받았을 때 “소개할 수 있다, 없다”로 나뉩니다. 엄밀히 말해 이 사람은 데뷔해도 괜찮겠다 싶은 수준이라 함은 내가 어딘가에 소개할 수 있는 수준을 말합니다. 정말 감이 좋은 분들이 아니고서야 입문자가 그 수준이 되기까지는 오래 걸립니다. 그때까지 산에 들어가서 풀 뜯어 먹으면서 번역 공부하실 자신이 있는 분들은 그러셔도 말리지 않겠습니다.

 

번역 실력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지표가 없기 때문에 본인의 실력을 확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냥 get set, go 사인을 기다리는 분들이 많은 걸로 압니다만 그 사인은 누가 해 줄 수 없습니다. 본인이 판단하고 출발하세요. 부정 출발로 실격도 당해 보고, 스트레칭 없이 뛰다가 쥐도 나 보고, 뛰면서 옆 선수의 팔꿈치에도 맞아 보세요. 첫 출전에 인생 최후의 레이스마냥 장렬하게 죽는 일은 없습니다. 뛰어보고 내가 낄 자리가 아니다라고 통감한다면 과감히 진로를 바꾸시면 되고 본인의 결과에 만족스럽지 않다면 다시 출발선에 서면 됩니다. 그 출발선의 개수는 걱정하시는 것보다 많습니다.

이력서를 보내서 거절당하든, 일을 시작한 후에 거절당하든 그 업체는 나를 데스노트에 적어두고 평생 기억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잠깐 스쳐간 번역작가일 뿐이죠. 다른 곳에서 열심히 커리어를 쌓다 보면 언젠가는 날 거절한 곳과 다시 일하는 경우가 흔히 생깁니다. 대부분의 경우 전에 이력서를 보냈던 사람인지 같이 일했던 사람인지 기억을 못 합니다. 대놓고 진상을 부린 경우가 아니라면야… 아무리 못했다 해도 1~2년 후의 실력은 완전히 또 다르기 때문에 소위 ‘까인’ 업체에 다시 지원을 해도 상관없습니다. 클라이언트들도 그걸 모르지 않습니다.

로버트 드니로는 최근 뉴욕대 티쉬 예술대 졸업식 축사에서 졸업생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Tisch graduates, you made it. And, you’re fucked. The good news is, that’s not a bad place to start

이 축사에서 그런 말을 했죠. 여러분은 평생 지겹게 거절당하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고. 나 또한 지금도 거절당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이 어마어마한 대배우도 오디션을 보러 다니고 캐스팅에서 거절당하는 일이 빈번하답니다.  번역작가라는 건 가뜩이나 본인이 원하는 바까지 도달할 확률이, 실현 가능성이 굉장히 낮은 직업입니다. 최대한 많이 부딪히세요. 깨지고 피가 철철 나도 후회 없이 부딪히시길 권합니다. 프리랜서로 사시겠다면 죽을 정도의 치명타를 맞아도 털고 일어설 줄 아는 터프함이 기본 덕목입니다. 물론 어려운 길인만큼 부딪혔을 때 아니라는 판단이 설 경우 미련을 갖지 않는 것도 중요하고요.

 

유작이란 건 데뷔작이든 뭐든 내가 그 길을 포기하는 순간의 작품이 유작입니다. 그게 유작인지 아닌지는 타인이 결정해 줄 수 없습니다. 나 말고는 그 누구도 멋대로 내 유작을 정하도록 두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