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마 - 번역후기 - 영화번역가 황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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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마 – 번역후기

셀마 – 번역후기

87회 아카데미 시상식 축하공연에서 존 레전드와 카먼이 영화 <셀마>의 주제곡 ‘Glory’를 열창하는 장면을 봤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셀마>에서 마틴 루터 킹을 연기했던 데이빗 오예로워가 하늘을 보며 눈물을 펑펑 쏟고, 시상식장의 모두가 기립박수를 치는 장면을 연출해 화제가 됐었죠. 저는 사실 우는 이유를 잘 몰랐어요. 그저 마틴 루터 킹의 영화니까 감동적이었겠거니, 같은 흑인으로서 감격할 만한 뭔가가 있었겠거니 짐작할 뿐이었죠.

시상식을 보고 얼마 후 <셀마> 번역 의뢰를 받았습니다.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았고, 로튼토마토 지수도 100%에 육박하는 작품인데 수입 정보조차 없어서 의아해 하던 와중에 연락을 받아서 더 반갑고 관심이 갔습니다.

내용은 아직 개봉 전이라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짐작하시듯이 마틴 루터 킹의 셀마 행진을 다룬 작품입니다. 굵직하면서도 전혀 따분하지 않은 작품이에요. <셀마>를 연출한 에바 두버네이 감독은 마블의 ‘블랙팬서’와 ‘캡틴마블’ 감독으로 거론되고 있을 정도로 역동적인 연출력에서 인정을 받고 있거든요. 따분한 전기 영화라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번역 중에 가장 고민했던 건 ‘니그로’라는 단어였어요. 당시엔 흑인, 백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 흑인을 가리켜 ‘니그로’라고 불렀거든요. 지금도 흑인들끼리는 친근함의 표시로 ‘니그로, 니거’ 등을 쓰긴 하지만 당시엔 마틴 루터 킹도 연설에서 ‘니그로’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쓸 정도로 통용되던 호칭이었습니다. 보통은 작품에서 ‘니그로’라는 말이 나오면 ‘깜둥이’로 씁니다. 흑인에 대한 경멸이나 비하의 뉘앙스가 있는 말이니까요. 그런데 이 작품은 상황이 좀 달랐어요. 등장인물 전원이 ‘니그로’라는 말을 너무 당연시 하니까.

결론은 흑인들이 자신들을 지칭할 때 쓴 ‘니그로’도 ‘흑인’으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음역해서 ‘니그로’라고 썼습니다. 관객들이 이런 시대상을 알았으면 했거든요. 흑인들도 ‘니그로’라는 명칭을 당연시 할 정도로 자존감이 굉장히 낮았던 시대라는 거죠. 이 점 오해 없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 크레딧과 함께 주제곡인 Glory가 나옵니다. 사실 이 곡은 모든 영화가 그렇듯이 대본에 가사가 없어요. 크레딧과 함께 올라가는 OST를 가사로 올리는 경우는 없잖아요. 그런데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은 곡을 흘려보내기가 아쉬워서 번역을 하기로 했습니다.(이건 생색을 좀 내야겠습니다! +_+) 실은 노래의 2/3가 랩이라 갈등했어요. 랩퍼도 아닌데 엉성하게 썼다가 욕만 먹을 것 같기도 하고… 괜히 일을 만드는 게 아닌가 싶고… 근데 제가 궁금해서라도 이 곡은 번역을 해야겠더라고요. 데이빗 오예로워가 오스카 공연을 보고 왜 그리 펑펑 울었는지 궁금했거든요.(전설 형님 노래나 멋있지 랩을 알아들을 수가 있길 하나 원…; 솔직히 저만 몰랐던 거 아니잖아요. 그츄?) 결국 번역을 다 마치고서야 이유를 알았습니다. 펑펑 울만 하더라고요.
(결국은 걱정대로 일을 키워서 번역을 마치고 작품 중간에 들어가는 곡들까지 다 번역해서 다시 넣게 됐습니다…)

영화 자체도 굵직하지만 마지막에 크레딧과 함께 나오는 Glory에서도 강렬한 감동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작품을 작업하던 시기가 올해 4월이었으니까 광화문에서 가슴 아픈 일들이 자주 있던 바로 그 시기였어요. 1960년대, 그것도 인종차별 문제로 시민과 정부가 부딪히던 장면에서 2015년의 한국 현실이 느껴질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작업하면서 그런 생각들로 복잡해서 많이 참담했어요. 리뷰들을 읽다 보니 저와 비슷하게 보신 분들도 많더라고요. 느끼는 바가 많은 작품입니다.

7월에 개봉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많이들 찾아 주세요. 🙂

PS. 하나 더 말씀드린다는 게..;; 자막은 시네메이트에서 올려 주셨는데 거의 장인의 손길이 느껴질 정도로 세심하게 작업을 해 주셨어요. 마지막에 나오는 설명 자막의 크기, 위치, 페이드인-아웃, 노래 가사의 자막 위치 등등. 싱크는 두말할 것 없이 훌륭하고요. 늘 느끼지만 이번에도 정말 최고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