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가 클라이언트와 투닥거려도 되나? - 영화번역가 황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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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가 클라이언트와 투닥거려도 되나?

번역가가 클라이언트와 투닥거려도 되나?

저번 포스팅에서 예고했듯이 이번엔 영화 자막이 어떤 식으로 완성되는지에 대해 썰을 풀어 보겠습니다. 최근에 인터뷰를 했던 기사가 나왔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세게 나왔어요. 번역계의 잔다르크가 되는 줄 -_-;; 제목도 그렇게 자극적으로 나올 줄 몰랐는데 좀 당황스러워서… 연관된 내용이라 이번 포스팅을 하는 김에 아예 방향을 틀어서 같이 적어 봅니다.

대개 영화 자막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번역작가가 번역을 해서 보내고 영화사에서 검토를 한 후 피드백을 보냅니다. 그럼 번역작가는 이 피드백을 보고 수정할 부분은 수정하고 다시 한번 검토하면서 그외 부분들도 전체적으로 다시 손을 봅니다. 그렇게 수정을 완료하고 발송한 자막이 극장 자막으로 올라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영화사마다 방식이 다르고 스타일도 다르기 때문에 이 과정이 상이합니다. 크게 보면 세 종류가 될 거예요.

 

일반적인 영화 번역 과정

1. 번역작가가 번역본 발송 –> 영화사에서 피드백 없이 자막 컨펌 –> 영상에 자막 올림.

2. 번역작가가 번역본 발송 –> 영화사에서 감수 후 번역작가에게 피드백 발송 –> 번역작가가 다시 검토한 후 수정해서 영화사에 발송 –> 자막을 최종 컨펌 —> 영상에 자막 올림.

3. 번역작가가 번역본 발송 –> 영화사에서 감수 후 자체 수정 –> 영상에 자막 올림.

 

대충 감이 오시죠?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1번은 영화사에서 번역작가의 자막에 아주 만족하는 경우예요. 더 바꿀 것도 없겠다 판단하고 오탈자만 잡은 후에 자막을 올리는 거죠.

2번이 가장 흔하고 거의 대부분의 영화사들이 취하는 방식이에요. 영화사 측에서 감수를 할 때 오역이나 오탈자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 번역 표현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죠. 그렇게 피드백이 오면 번역작가가 의견을 반영하고 수정 과정을 거쳐 다시 발송합니다. 이렇게 의견을 주고 받는 과정이 서너 번 이상 반복되기도 해요.

3번의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이때는 번역작가도 자막이 어떻게 수정되는지 몰라서 극장에 가서야 최종 자막을 확인합니다.

번역작가 입장에선 몇 번이 편할까요? 물론 1번입니다. 클라이언트가 그렇게 만족한다는데 편한 게 당연하죠. 작업 과정도 짧아서 번거롭지도 않고요. 그런데 번역가의 기호를 떠나 가장 건설적인 시스템은 2번입니다. 1번의 경우 오역이 나오기도 쉽고 번역가가 외부의 자극이 없기 때문에 박스에서 나오지 못 하는 일도 생깁니다. 쉽게 말해 쪼임(?)을 당하지 않으면 헬렐레… 작가 입장에서만 편한 자막이 나올 수도 있다는 거죠.

 

클라이언트와 투닥거려도 되나?

2번이 가장 흔하다고 말씀드렸는데 영화사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습니다. 한 번의 피드백과 수정으로 마무리하는 곳도 있고 마음에 들 때까지 피드백과 수정 요청을 반복하는 영화사도 있습니다. 저는 이 과정엔 딱히 불만이 없는 편이라 클라이언트가 만족할 때까지 수정합니다. 번역 수정본이 최대 7차까지 나온 적도 있었어요. 번역가의 번역본 발송과 영화사의 피드백 발송이 일곱 번 정도 있었다는 거죠.

이 과정에선 클라이언트와 투닥거리는 경우가 많아요. 번역작가는 자신이 좋다 생각한 이 자막을 고치고 싶지 않고 영화사 입장에선 이것만은 고쳤으면 좋겠고. 이럴 땐 왜 그 자막이 더 좋은 자막인지 설득을 해야 합니다.(완전히 독해에 가까운 직역 같은 자막을 요구하시는 경우도 있거든요.) 딱히 주장에 설득력이 없는데 번역작가가 고집을 부리면 클라이언트 입장에선 껄끄럽겠죠. 자존심이 센 번역작가의 경우 자막에 손을 대는 것 자체에 경기를 일으키기도 하거든요. 제가 전엔 딱 그런 편이어서(케이블 번역을 할 때부터 그랬어요) 감수하는 분들과 꽤 투닥거렸어요. 지금이야 생각이 좀 다른데 전엔 꼬장꼬장 성격도 GR맞아서… 지금까지 그 꼬장을 피웠는데도 꾸준히 일을 주셔서 굶어죽지 않게 해주신 관계자 분들께 감사를… 덕분에 장가도 가고 여직 잘 살아있어요. -_-;;

건마다 의뢰를 받는 프리랜서다 보니까 클라이언트와 투닥거리거나 감정 싸움을 벌이는 건 아주 미련한 짓입니다. 그냥 영화사의 수정 요청을 100% 다 들어 드릴 수도 있고,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드리면 안전하거든요. 그런데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자신이 최선을 다한 작업에 대한 프라이드도 없이 클라이언트의 말이라고 고민도 없이 무조건 수긍하는 건 아무 짝에도 도움이 안 됩니다. 클라이언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았다는 안도감만 남을 뿐이죠. 그런 태도는 제가 보기엔 좀 비겁하다는 생각까지 해요. 클라이언트가 명백히 틀린 말을 할 땐 틀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결국엔 클라이언트도 만족할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어요. 다만 이 과정에서 서로 감정이 상할 정도로 격하게 고집을 부릴 필요는 없다는 거죠. 어느 분야든 이런 조정을 잘하는 프리랜서가 정말 노련한 프리랜서가 아닐까 싶어요. 전엔 자막으로 하도 투닥거려서 서로 미운 정이 든 분도 있었어요. ㅋㅋ

 

전문가인 번역작가의 주장이 늘 옳을까?

안타깝게도 늘 그렇진 않습니다. -_-;; 요샌 영어를 다 잘하시기 때문에 영화사에 있는 분들이 저보다 영어를 훨씬 잘하는 경우가 허다해요. 그래서 종종 오역이 잡히기도 하고 좋은 표현이 있으면 피드백에서 찔러 주시기도 하죠. 위에도 말했지만 전에는 감수자가 비전문가라는 생각에 제 자막에서 조사 하나 고치는 데에도 경기를 일으키곤 했어요. 따지기도 많이 따졌고. 최근엔 생각이 많이 바뀐 편인데 그 계기가 된 작품이 두 개 있습니다. 인터뷰할 때도 종종 얘기하는 작품인데 <아메리칸 허슬> <프란시스 하>예요. <아메리칸 허슬>의 맨 첫 장면에 이런 자막이 뜹니다.

어느 정도는 실화임

이건 첫 번역본을 넘길 때 아주 노멀하게 작업했던 부분이에요. ‘실화를 기초로 하였음’ 정도로. 그런데 영화사에서, 그것도 모두 별 이의가 없던 상황에, 한 분만 원문의 part of 라는 뉘앙스를 살렸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고집하셨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은 그 부분이 재밌다면서. 저도 처음엔 별거 없는데… 싶었다가 하루쯤 생각했을까요. 갑자기 그 표현이 너무 웃긴 거예요. -_-;; 밥 먹다가 갑자기 떠올라서 적어놓고 메일을 드렸어요. 그게 재밌겠다고 이렇게 가자고. 제가 시사회까지 해서 영화관에서 <아메리칸 허슬>을 세 번 봤는데 세 번 모두 관객석에서 저 첫 자막에 웃음이 나왔어요. 말을 듣길 잘했다 싶었어요. 연출자의 의도를 살렸고, 관객들이 그 의도에 맞게 웃었으면 성공한 자막이거든요. 사실 그 웃음은 전적으로 그 의견을 주신 영화사 분의 공입니다.

두 번째는 <프란시스 하>,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자막은 ‘안 생기는’이란 표현이에요. 이것도 1차 번역본에선 다르게 드렸는데 이 부분은 다시 생각해 주셨으면 한다고 피드백을 주셨어요. 그때 Undateable 단어 하나 가지고 반나절 넘게 고민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고쳐나온 자막이 ‘안 생기는’이었는데 관객 분들이 좋아해 주시는 걸 보고 이것도 다시 고민하길 정말 잘했단 생각이 들었죠.

이런 예들 때문인지 요샌 전보다 영화사의 피드백을 더 경청하는 편입니다. 쪼임(?)을 통해 더 좋은 자막이 나오는 경우들을 겪어 봤으니까요. 가장 크게 느낀 예를 두 개 썼지만 위와 같은 예가 꽤 많습니다.

 

뭐든 과하면 독이다

위에도 말했지만 클라이언트와 번역작가가 상의하고 고심해서 결과물을 내는 과정이 번거롭긴 해도 가장 건설적이고 좋은 방식입니다. 번역가든 클라이언트는 한쪽이 너무 고집을 부리면 자막이 산으로 가죠;; 뭐든 과할 땐 좋지 않습니다. 어쩔 땐 번역본 전체에 빨간 줄이 가 있는 경우도 있거든요. 클라이언트에서 자막에 만족하지 못 했거나 다른 의견이 있는 경우인데 이럴 땐 자괴감이 들기도 해요. 내가 이렇게 못 했나 싶은 -_-;;

한번은 정말 역대급 피바다 같은 피드백 대본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클라이언트가 아니라 홍보사 측에서 온 피드백이었어요. 대본 감수를 홍보사에서 하신 거죠. 사실 이런 경우는 굉장히 드물고요. 저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홍보사에서 특정 대사는 마케팅에 이용하고 싶다고 이런이런 어휘들을 써달라고 하실 순 있어요. 그런 경우야 최대한 반영해야겠죠. 다 같이 한 작품을 두고 일하는 스탭이니까요. 그런데 홍보사에서 보낸 피범벅인 피드백을 받아 보니까… 좀 당황스럽더라고요. 이걸 어떻게 손을 봐서 드려야 할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다 설명을 하고 설득을 하는 것도 비효율적이고.

어쩌다가 클라이언트에서 정말 하드코어 문어체로 직역을 요구하시는 경우도 있는데 설득을 하고 상의를 해도 의견이 좁혀지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이런 경우는 클라이언트의 요청대로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를 보면서도 계속 아쉽고 한숨도 나오고 하는 경우가 저도 있었어요. 이럴 때가 정말 아쉽죠.

 

가장 중요한 건 소통

맨 위에서 말씀드린 3번의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만 가장 좋지 않은 결과물이 나오는 방식입니다. 번역가-클라이언트 간의 상의도 없이 1차로 보낸 번역을 영화사에서 직접 수정하는 경우인데 이럴 경우 어휘는 물론이고 조사나 어미가 엄청나게 많이 수정되기 때문에 캐릭터들의 어투가 뒤범벅이 돼 버려요. 하오체를 쓰던 캐릭터가 난데없이 극존칭이나 해라체를 쓴다거나 마초 같은 캐릭터가 어느 장면에선 천생여자 같은 어미를 쓴다거나 하는.

과정만 따져서는 1, 3번 과정이 번역가에게 제일 편하고 수고가 덜합니다. 2번 과정이 가장 번거롭고 스트레스도 많죠. 하지만 저는 수정에 수정을 거치는 반복 작업에서 오는 스트레스보다 나도 모르게 내 자막이 변형돼 있는(아주 좋지 않은 방향으로) 걸 목격하는 스트레스가 훨씬 심합니다. 차라리 수정 요구 수십 번을 받아도 서로 상의하고 고민하면서 좋은 결과물을 내는 게 낫죠. 그래서 처음 작업하는 영화사에는 아예 그렇게 말을 합니다. 피드백을 몇 번을 주셔도 상관없으니까 끝까지 상의해 주시라고.

 

영화의 주인은 관객

내 새끼, 내 새끼 하지만 영화의 주인은 번역 작가도 아니고 홍보사도 아니고 심지어 영화 수입사도 아닙니다. 영화의 주인은 관객이죠. 모두 관객에게 가장 좋은 결과물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스탭이라 생각하고 작품을 위한 최선이 어떤 것일지 함께 고민하는 게 가장 좋은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