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번역하려면 영어 엄청 잘해야 해요? - 영화번역가 황석희
7885
post-template-default,single,single-post,postid-7885,single-format-standard,ajax_updown_fade,page_not_loaded,,vertical_menu_enabled, vertical_menu_transparency vertical_menu_transparency_on,qode_grid_1300,side_area_uncovered_from_content,qode-content-sidebar-responsive,transparent_content,qode-theme-ver-13.0,qode-theme-bridge,wpb-js-composer js-comp-ver-4.12,vc_responsive

영화 번역하려면 영어 엄청 잘해야 해요?

영화 번역하려면 영어 엄청 잘해야 해요?

뜬금 없이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댓글로든 메일로든 저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에요. 한번 정리해서 쓰고 다음부터는 이 링크를 드려야겠습니다. 그외 자주 듣는 질문 몇 가지 더 써 보자면.

1. 유학 가야 해요?
2. 번역 대학원 가야 해요?
3. 몇 년 영어만 파야 해요?

이 정도가 있습니다. 유학 안 가도 되고, 번역 대학원 안 가도 되고, 몇 년 영어만 파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유학이든 번역 대학원 진학이든 깊은 영어 공부든 나름의 길로 이어질 가능성들이 있는 좋은 도전들이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하시는 게 좋죠. 그런데 오로지 번역가가 되고 싶어서 그 길을 지나겠다는 건 추천하기 어렵습니다. 저도 유학 안 갔고 번역 대학원 안 갔고 영어만 죽어라 공부하지도 않았습니다.(그래서 이런 한량 번역가가 된…? -_-)

영어권 영화를 번역하는 일이니 당연히 영어를 잘하면 좋습니다. 원어민 수준이면 더할 나위가 없겠죠. 그런데 그런 고민을 하실 땐 내 한국어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아니, 한국어 실력부터 고민하셔야 합니다. 한영 번역을 한다면 한국어 실력보다 영어 실력이 우수해야 하지만 영한 번역이라면 영어보다 한국어를 잘하는 쪽이 확실히 유리합니다. 제가 가끔 드는 예 중 하나를 들어 보겠습니다.

they control the city.

이런 문장에서 control은 어떻게 번역하는 게 좋을까요? 제일 먼저 떠오른 표현은 ‘통제’일 겁니다. 그 뒤로 ‘조종’ 등도 있겠고요. control은 워낙 쉬운 단어이기 때문에 굳이 따로 영어 사전을 뒤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아는 뜻 중에 하나를 쓰려고 할 테니 머릿속에 있는 어휘 풀을 가동하게 되겠죠. 혹시 그 중에 ‘장악’이나 ‘지배’라는 표현도 있나요? 그렇다면 어휘력이 좋으신 편입니다. 그런 어휘 풀은 독서량과 비례한다고 할 수 있어요. 그 어휘들을 떠올리고 응용하는 능력은 글쓰기에서 비롯되는 거고요. 이런 건 영어 실력이 아니라 한국어 실력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번역 작가 분 중에 이런 어휘의 폭이 굉장히 넓은 분이 계십니다. 수첩으로 적기 바쁜 자막을 뱉어 내는 분이죠. 그때마다 생각합니다. 책을 얼마나 읽어야 이런 어위가 막 쏟아지는 걸까 하고.

 

강의할 때 영어권에서 10년, 20년 정도 사신 분들도 가르쳐 봤지만 한국어 실력이 좋은 분들의 번역이 확실히 좋았고 발전도 빨랐습니다. 물론 영어 실력이 형편 없어도 된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선이 있겠죠. 다만 실제로 작업에 도움이 되는 선은 과도하게 높지는 않다는 소립니다. 그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영어 능력의 하한선이 ‘5점’이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A라는 사람은 영어 능력이 6점, 한국어 능력이 10점
B라는 사람은 영어 능력이 10점, 한국어 능력이 6점

위와 같은 경우는 대부분 A의 번역이 확연히 좋습니다. 번역가로서의 영어 실력 기본 하한선을 통과한 사람들끼리 비교하는 경우 번역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한국어 실력이란 얘기죠.

원어민 뺨치는 영어 실력을 갖추지 않고 그 수많은 비속어와 관용어구는 어떻게 번역하느냐 걱정하시겠지만 구글에 검색해서 나오지 않는 단어나 관용어구는 100개 중 1개가 될까 말까 합니다. 그마저도 주변의 외국인 친구나 yahoo answers에 물어보면 금세 답이 나옵니다. 지금은 단어장에 하루 100개씩 단어를 적어 달달 외워야 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반대로 ‘fucking around‘를 ‘삐대다‘ 혹은 상황에 따라 ‘주접 떨다‘ 등으로 옮기는 건 인터넷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어 실력부터 늘리라는 얘기를 자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새 독서량이 부쩍 줄은 저도 죄책감을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책을 잔뜩 샀지만 여전히 안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글도 뻘쭘하고 그래서 또… 그래설라무네… 아… 죄송합니다. -_-;;

전에도 한 번 썼던 것 같은데 ‘번역가 되려면 영어를 얼마나 잘해야 해요?’라는 질문에 원칙적으로, 또 정석대로 답변해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토익, 토플 따위는 발가락으로 풀어도 만점을 받아야 하고 영어권(미국,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등등) 원어민들과 의사 소통에 0.1% 어려움도 없어야 하고 해당 언어 박사 수준의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제가 예로 들었던 능력치로 설명하자면 영어  10점, 한국어 10점이 가장 좋다는 거죠. 그러니 위와 같은 질문은 사실 의미가 없습니다. 원칙적인 답변을 원하신다면 저도 위와 같이 답변해 드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영어도 꾸준히 공부하시되 본인의 한국어 실력부터 점검해 보시는 게 가장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