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화 번역이 영화 흥행에 미치는 영향 - 영화번역가 황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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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화 번역이 영화 흥행에 미치는 영향

외화 번역이 영화 흥행에 미치는 영향

이 글은 쓰자쓰자 마음만 먹고 못 쓴 지 몇 년 된 글이에요. 최근에야 생각이 좀 정리돼서 갖고 있던 생각을 풀어 보려 합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기 때문에 다른 번역가 분들의 생각은 저와 정반대일 수도 있음을 미리 말씀 드립니다.

가끔 인터뷰를 할 때, 혹은 번역에 관심 있는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이런 질문을 종종 듣습니다.

번역이 흥행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그럼 똑 부러지게 대답하기가 어려워요. 저야 번역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입장에서 대답하기엔 번역에 따라 흥행이 엄청 크게 좌우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실상은 또 그렇지도 않거든요. 번역이 굉장히 좋은 작품이 흥행에서 망하는 경우도 많이 봤고, 자막이 형편 없는데도 흥행몰이에 성공한 경우도 많이 봤습니다.(저는 영화를 보러 가면 직업병 때문에 그런지 작품 그 자체에 집중을 못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번역을 주로 봐요.) 결국 중요한 건 번역도 마케팅도 아닌 영화 자체가 가진 힘이라는 건데요. 요새는 위와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하는 말이 있긴 해요.

번역이 흥행을 좌우하진 않지만 잘될 영화를 더욱 잘되게, 부진이 예상되는 영화를 폭삭 망하게 할 힘은 있다.

의도적으로 영화를 망하게 한다는 게 아니라 -_-;; 못난 자막을 쓰면 가뜩이나 적은 관객의 발길을 더 적게 만들 수 있단 얘기예요. 잘 쓴 자막은 영화를 살리는 힘이 있지만 이미 죽은 영화를 살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번역가는 네크로맨서가 아니에요.;; 차라리 솜씨 좋은 메이크업 아티스트나 F1 메카닉 정도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그냥 둬도 예쁘지만 거기서 훨씬 예뻐지게 만들 수 있는 힘, 그냥 둬도 빠르지만 mm 단위까지 계산해서 더 빠른 속도를 내게 하는 힘. 이런 조력자의 힘이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간혹 죽은 영화도 살릴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생각하고 무리한 번역을 요구하시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그럼 번역가는 나름대로 힘을 짜내어 영화의 갈비뼈가 다 부스러질 정도로 심폐소생술을 합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이건 영화나 번역가 양쪽 모두에게 좋지 않아요. 얼마 전 어떤 영화 기자 분이 어떤 영화 자막을 일컬어 경박하다는 표현을 쓰시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번역가의 커리어에도 좋을 게 없겠죠.

결론적으로 “그럼 왜 영화사가 돈을 더 들여 좋은 자막을 써야 하느냐?” 라는 질문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저라면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좋은 자막은 내 영화에 대한 애착과 정성, 존중을 표현하는 기본적인 수단이며, 내 영화를 찾아 준 관객들을 위한 최고의 정성어린 선물이다

영화 번역 경력이 오래 되지도 않았지만 외화업계에 계신 분들은 냉철한 사업가라기보다 로맨티스트인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오너부터 직원들까지 대부분 그러세요. ‘내 영화, 내 새끼’라는 인식이 굉장히 강해서 애착이 느껴질 정도로 세심한 노력들을 기울이십니다. 영화 구매부터 마케팅, 개봉에 이르기까지 작품에 정이 들지 않을래야 들지 않을 수가 없죠. 그래서 영화사들은 한푼이라도 아껴서 작은 프로모션이라도 하나 더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저런 곳에 쓰기 위해 아끼는 비용의 대부분이 번역료에서 빠진다는 게 아쉽죠. 기백만 원 단위의 프로모션이 아니라 엽서나 펜 같은 수십만 원 대의 작은 프로모션. 너무 번역가의 입장에서만 말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지만 내 새끼를 더 좋은 모습으로 세상에 내놓고자 하는 욕심이 있다면 번역에 더 투자를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수백만 원의 예산이 더 투입되는 거라면 고민을 해야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더 좋은 번역을 위해 투자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게 달라는 게 아니라 좋은 번역가들이 많으니 그분들을 써 주세요. 조금이라도 아끼시겠다고 번역업체에 맡겨서 사내에서 수정하신다거나, 대충 초벌 번역을 의뢰해 받아서 수정하는 방식은 공들여 개봉시키는 영화의 질을 현저히 떨어뜨립니다.

정말 좋은 작품들이 희한한 자막으로 퇴색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수소문하지 않으면 누가 번역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이상한 번역도 많고. 저야 어차피 제 작품이 아니니 신경 쓸 일도 아니지만 괜히 속이 상합니다. 제가 종종 쓰는 표현인데 펄떡펄떡 뛰는 최상급 횟감을 가져다가 갈기갈기 난도질을 쳐놓은 걸 보는 일식 요리사의 기분이에요. 좋은 번역가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저는 영화 자체보다 번역가부터 알고서 일부러 상영관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고 배우고 감탄하고 응용하고 즐기고. 우리나라에 좋은 번역가 참 많습니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번역가들까지 포함해서요. 정 찾기 힘드시면 물어보세요. 당장 물어보셔도 제 주위에 손꼽을 수 있는 사람이 몇 있습니다.

작품을 내 귀한 자식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식을 위해 최소한의 투자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건 차가운 사업가라기보다 로맨티스트인 그분들에게 바라는, 로맨티스트의 철없는 부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