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하 번역 후기
7342
post-template-default,single,single-post,postid-7342,single-format-standard,ajax_updown_fade,page_not_loaded,,vertical_menu_enabled, vertical_menu_transparency vertical_menu_transparency_on,qode_grid_1300,side_area_uncovered_from_content,qode-content-sidebar-responsive,transparent_content,qode-theme-ver-12.0,qode-theme-bridge,wpb-js-composer js-comp-ver-4.12,vc_responsive

프란시스 하 – 번역 후기

프란시스 하 – 번역 후기

프란시스 하는 사랑스럽고 밝은 영화지만 번역하면서는 상당히 괴로웠습니다. 말이… 너무 많아요 -_-;; 그리고 느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장면 전환이 좀 뜬금없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A라는 얘길 하다가 갑자기 전혀 상관없는 B로 넘어가 버리는. 이런 장면들을 마주할 때마다 내가 놓친 게 뭔가 있던 건지, 혹은 전 문장과 뭔가 이어지는 말인데 나만 이해를 못 하고 있는 건지 고민하곤 했습니다. 그런 뜬금없는 대사 연결로 하루 종일 낑낑대다가 “유레카!” 하고 떠오른 부분도 있었어요. 레이첼의 집에서 저녁을 먹는 장면. 프란시스가 살짝 술에 취해서 주절주절 하는 얘긴데요.

제가 원하는
어떤 순간이 있어요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제가 원하는 건데

그래서 제가 아직
싱글인 것 같기도 하고

설명하긴 힘든데…

어떤 거냐면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땐

서로의 호감을
쉽게 눈치채잖아요

하지만 파티에서

각자 다른 사람과
얘기하고 있고

웃고 있는 상황에

눈을 돌리다가 서로에게
시선이 멈추는 거예요

불순한 의도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이번 생에 그 사람이
내 사람이라서…

언젠가 끝날 인생이라
재밌고 슬프기도 하지만

거기엔 비밀스런 세계가
존재하고 있어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우리만 아는 세계

쉽게 말해 우리 주변에
수많은 차원이 존재하는데

우린 그걸 느낄
능력이 없다잖아요

그게…

누군가의 관계에서
제가 원하는 거예요

인생에서도 그렇고

사랑에서도

 

결국은 이 부분의 대사가 고민한 만큼은 만족스럽게 나왔어요. 그렇게 고민하고도 제대로 안 나왔으면 속이 엄청 상했을 텐데. 아무튼 장면 전환이 좀 뜬금없어서 고생한 기억이 많아요.

<프란시스 하>의 명대사

프란시스 하에는 명대사가 꽤 많아요. 명대사라기보다 톡톡 튀는 대사들이 많아요. 딱히 흥미로운 서사가 있는 것도 환상적인 미장센이 있는 것도 아닌 이런 작품은 캐릭터의 매력과 캐릭터들 사이의 대화가 영화 재미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이나 <비포 미드 나잇> 같은 영화가 이런 류에 속합니다.) 그럼 당연히 번역가는 부담이 더 되겠죠.

캐릭터를 파악하고 그에 가장 어울리는 말투와 표현들을 찾아 가장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


이건 영상 번역의 기본이라 모든 외화 번역에 적용되는 기술이지만 글맛이 중요한 작품일수록 더 깊이 생각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캐릭터에 가장 어울리는 색을 찾아 칠하는 건 번역가니까요. 엉뚱한 색을 칠한다거나 너무 과하게 색을 칠하면 오히려 캐릭터를 망가뜨립니다. 프란시스처럼 흥미로운 캐릭터를 만나면 늘 의욕이 앞섭니다. 욕심도 나구요. 그래서 더 지르고 싶었는데 간신히 꾹꾹 참은 것도 있네요 -_-;;

안 생기는 프란시스 (네이버 검색 결과 링크)
<프란시스 하>에서는 ‘안 생겨요’라는 대사가 가장 반응이 좋았어요. 처음엔 모태솔로라고 썼는데 한 번 더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피드백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미친듯이 브레인스토밍을 했어요.

 

솔로팔자, 종신솔로, 솔로교주, 만년솔로, 셀프솔로, 솔로부대, 솔로군단, 솔로궁상, 궁상솔로, 지지리궁상, 연애세포결핍증, 안 생겨요

 

딱 맞는 표현을 찾아야 할 땐 이런 식으로 되는 대로 마구 적어 놓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영화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벤지가 undateable로 pun(말장난)을 치는 부분이 있어요. 저는 번역 중에 정말 어쩔 수 없이 pun에 항복하는 경우가 생기면 그렇게 자괴감이 들 수가 없어요. 맹색이 번역 작가라는 게 이런 거 하나 처리 못 하는구나… 하고 자학을 합니다.(이런 거에 편집증이 좀 있어요. -_-;;) 그래서 열에 아홉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pun을 죽이지 않으려고 해요. undateable 부분은 영화사에서 ‘연애불능’으로 의견을 주셨는데 그러면 벤지의 대사에서 pun을 죽여야 하거든요. 그래서 고민을 오래 했어요. 그러다 나온 대사였는데 의외로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이동진 평론가님도 좋다 하셨다고!! +_+) 번역 작가의 똥고집을 흔쾌히 이해해 주신 영화사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잡설

4월 말부터 영화 번역 작업을 하지 못 했습니다. 의뢰를 받아 놨던 작품들도 의뢰를 완료하지 못 했구요. 그렇게 놓친 작품들 중엔 정말 피 눈물 나게 아까운 작품들도 있습니다. 그게 너무 아쉬워서 발을 동동 구르지만 앞으로 더 좋은 작품들이 많을 테니 미련을 갖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저런 이유로 힘이 들 때 마지막으로 번역했던 <프란시스 하>가 선전하는 모습을 보고, 번역을 좋아해 주는 분들을 보고 힘이 많이 났어요. 메일로 메시지로 번역 좋았다고 영화 잘 봤다는 인사를 많이 받았거든요. 과분한 칭찬, 힘이 되는 응원 오히려 제가 감사했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작품에서 더 좋은 번역으로 뵐게요. 걱정해 주시고 응원해 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