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자막 의역의 한계? (레드2 관련) - 영화번역가 황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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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자막 의역의 한계? (레드2 관련)

극장 자막 의역의 한계? (레드2 관련)

영상번역에 관심 있는 분들이 가끔 묻는 질문이기도 하고 최근에 번역한 레드2(레드 더 레전드)의 몇몇 대사를 보고 불쾌해 하신 관객들이 있어서 이참에 포스팅으로 정리합니다.

마침 이번에 얘기가 나온 부분이 딱 좋은 예라 레드2에 나온 대사를 가지고 설명해 보겠습니다. 저는 번역을 하면 항상 번역평을 뒤지기 때문에 호평, 혹평 모두 보고 설명할 부분은 설명하고, 사과할 부분은 사과하고, 칭찬엔 감사의 인사를 합니다. 이번에 그나마 가장 많이 눈에 띄는 번역평이 두 개 있습니다.

 

  1. 크립토나이트를 왜 아킬레스건이라고 썼냐.
  2. 지미추를 왜 그냥 하이힐이라고 썼냐.

 

[dropcap type=”square” round=”yes” color=”#f5f5f5″ background_color=”#4583b3″ ]간[/dropcap]단히 말하면 “내 귀에는 잘 들렸는데 자막엔 엉뚱한 게 나온다”라는 건데요. 아마 글만 보고 짐작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1번은 남성 분들이 주로 하신 말이고 2번은 여성 분들이 주로 하신 말입니다. 재밌는 건 1번을 지적한 남성 분들이 2번을 지적하거나, 2번을 지적한 여성 분들이 1번을 지적한 예는 아직까지 못 봤다는 겁니다. “내가 못 알아들은 부분의 의역은 아무 상관 없지만 알아들은 부분의 의역은 못 참겠다” 실은 뭐 저도 번역하기 전엔 이런 생각들 자주 했습니다. -_-;;

위의 한 줄을 읽고 제가 포스팅에서 쓰려는 바를 벌써 파악한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영상번역에서 의역의 한계가 어디까지냐”라고 묻는다면 원칙적으로는 한계가 없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상식 밖의 어휘를 가져다 치환할 순 없겠죠. 의역은 어감이나 뜻이 비슷한 어휘, 혹은 그 목표 언어(원어)의 뜻을 포함하는 상위 개념의 어휘를 사용합니다.

영상번역은 여기서 생각할 요소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관객층이라는 건데요. “그 영화를 누가 가장 많이 볼 것이냐?”라는 질문도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저도 소수의 매니아층을 위한 영화라면 음역을 하든 전문 용어를 쓰든 그대로 가는 게 옳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런 대중 영화에서까지 그런 어휘를 쓸 순 없습니다.

화력 증원 요망!

포대삼발, 화집점 찰리
줄이기 둘백, 좌로 하나백

적이 개활지에 있다
효력사 요망, 이상!

[dropcap type=”square” round=”yes” color=”#f5f5f5″ background_color=”#4583b3″ ]위[/dropcap] 자막은 제가 BOB(밴드 오브 브라더스) 번역 당시 썼던 자막입니다. 육군 현역 전역한 분들도 포병이 아니면 어지간해선 알아들을 수 없는 전문용어죠. 개인적으론 저 자막 세 개를 처리하느라 세 시간 가까이 잡아먹었습니다. 현직 포병 중사에게 물어보느라. 포병 교범 확인하느라. 왜 이때는 이렇게 극소수만 알아듣는 자막을 썼을까요? 매니아층이 보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 작품을 가장 많이 봐주기 때문이에요. BOB 극장판이 나온다면 저는 저렇게 번역할 겁니다. 시간이 아무리 많이 걸리고 힘들어도 최대한 리얼하게 쓰려고 노력할 거란 얘깁니다. 레드2의 풀어서 가는 자막과 차이가 보이시나요?

저도 원래 레드2에서 번역은 “크립토나이트” 그대로 썼습니다만(번역 당시 크립토나이트라는 말을 여자 분들도 다 알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회사에 계신 여자 직원 분들이 크립토나이트가 뭔지 아무도 모르셨습니다. 설마 하고 물어봤지만 제 아내도 몰랐고요. 아마 어지간한 여자 분들은 모르실 겁니다. 여자 분들은커녕 슈퍼맨 세대가 아닌 남자 분들(30대 미만)도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관객들이 알아듣도록 수정된 거죠.

지미추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 분들 지미추가 뭔지 아시는 분들 별로 없을 겁니다. 이 부분도 뉘앙스를 살려 봤자 “명품 구두” “하이힐” 정도입니다. 프라다 정도만 해도 그냥 썼을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그냥 하이힐로 번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dropcap type=”square” round=”yes” color=”#f5f5f5″ background_color=”#4583b3″ ]자[/dropcap]막은 표지판이다.

 

이 부분은 따로 포스팅에서 다룰 생각이었는데 관계된 내용이라 슬쩍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저는 영상번역 자막은 표지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관객들이 A 문화에서 B 문화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라는 거죠. 관객들은 B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표지판에 그려진 방향을 보고 이동합니다. 그런데 그 표지판이 아주 소수만 알게 그려졌다거나 표지판을 그린 사람이 너무 제멋대로 그려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면? 그 표지판은 표지판으로써의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관객들도 있습니다.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닙니다만 내 권리가 희생된다고 외치는 분이면 나머지 다수 관객의 권리도 소중한 줄 아셔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장담하건데 100%를 충족시킬 수 있는 번역은 없습니다. 그 중간 지점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요. 이럴 때는 많은 분들이 보고 그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표지판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dropcap type=”square” round=”yes” color=”#f5f5f5″ background_color=”#4583b3″ ]관[/dropcap]객 분들이 오역이라고 말하는 자막의 상당수는 이런 경우에 속합니다. “니가 뭔데 원작자가 고른 단어를 멋대로 바꾸냐?””라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원작자의 의도를 완전히 벗어나는 주제 넘은 번역 아니라 해당 언어 사용자들이 잘 이해하게끔 번역된 부분이면 이런 부분은 오히려 원작자가 번역자에게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남자 관객들이 지미추를 못 알아들었고 여자 관객들이 크립토나이트를 못 알아들었듯이 서로를 위한 이해의 여지는 줘야 한다는 거죠.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을 겁니다. 그때마다 설명드리고 하긴 어렵겠지만 그렇게 번역하는 이유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하고 포스팅을 하나 정리해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