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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드라마 몇 편을 번역하면 경력자일까?

영화, 드라마 몇 편을 번역하면 경력자일까?

몇 편이나 번역해야 경력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영상 번역계에서 “나름 경력이 있다”라고 말하려면 최소 몇 편 정도의 경력이 있어야 할까요? 여기서 말하는 영상 번역계는 극장 영화를 제외한 케이블 TV나 IPTV, VOD, OTT(넷플릭스, 아마존 등) 서비스 작품을 번역하는 시장을 말합니다. 영화는 너무 길기도 하고 영상 번역계에선 드라마나 다큐, 버라이어티쇼 등을 주로 번역하니까 편당 45분에서 50분짜리라고 치고, 몇 편이면 될까요? 30편? 50편? 100편?

제가 생각하는 최소 편 수는 500편이에요. 너무 많은가요? 왜 500편이라고 하는지 설명해드릴게요. 영상 번역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번역가라고 하면 한 달에 드라마 20편은 작업합니다. 한 달에 드라마 한 시즌을 작업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1년에 240편, 2년이면 480편. 2년만에 거의 500편에 육박하죠.

그런데 이 페이스는 거의 휴식도 없는 페이스입니다. 매일 한 편씩 뗄 속도가 된다고 해도 이렇게 작업하다 보면 지쳐버려요. 제가 한창 케이블 TV 번역을 할 땐 저는 물론이고 다른 번역가들도 이 페이스로 작업하긴 했지만 솔직히 쉬운 페이스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간을 아주 넉넉히 잡아서 3년에 500편. 이 정도면 숨이 찰 정도의 페이스도 아니고 여유롭습니다. 그런데 사실 매월 20편 정도는 작업해야 안정된 수입을 유지할 수 있어요. 3년에 500편이면 월 13편을 번역한다는 소린데 이 정도 수입으로는 조금 버거울 수도 있거든요. 지금은 제가 할 때보다 단가가 조금 오른 상황이라 나을지 몰라도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준의 수입은 안 됩니다.

제가 위에서 “나름 경력이 있다”라고 말하려면 500편은 해야 한다고 말한 근거는 이거예요. 500편이라고 해봤자 꾸준히 2년을 작업한 경력밖에 되지 않아요. 길게 잡아서 3년을 일한 경력. 영상 번역만이 아니라 어느 분야에 나름 경력이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려면 2~3년으론 부족한 게 사실이죠. 그래서 “최소로 잡았을 때” 500편이라는 거예요. 500편도 엄청 많은 게 아닙니다.

뜬금없이 경력 얘길 꺼내는 건 최근에 민망한 글들을 조금 봤기 때문이에요. 드라마 한두 시즌 번역한 경력이 전부인 사람들이 경력자를 자칭하면서 제자를 양성한다고 엉뚱한 것들을 가르치기도 %9 본 사람이 극장 영화 번역한다고 케이블 번역가들을 무시하는 글도 봤고. 극장 번역가와 케이블 번역가는 실력 차이가 나지도 않아요. 많이 나봐야 종이 한 장 차이죠. 오히려 경력 많은 케이블 번역가의 실력이 훨씬 좋습니다.

한 2년 됐을까요. 번역 아카데미를 갓 졸업하고 번역회사에 감수직으로 들어간 어떤 사람이 경력 10~15년 되는 번역가들에게 갑질하는 걸 보고 뚜껑이 열려버린 일이 있었어요. “영상번역계가 얼마나 좁은지 아느냐” 따위의 소릴 늘어놓더라고요. 결국은 사과를 받아냈어요. 그 좁은 영상번역계, 제가 알아도 훨씬 잘 알거든요. 그분 회사에 일감 주는 클라이언트 실무자들도 다 알던 상황이었으니까요. 이렇게 작은 감투 하나만 써도 자기 경력을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지금은 좀 겸손하게 지내시나 모르겠네요. 두고보자고 글 썼다가 저한테 또 걸렸었거든요. -_-. 저는 번역 관련한 글은 거의 다 모니터링해요.(징그럽죠?)

영상번역도 타고난 재능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100편 번역한 사람이 10편 번역한 사람보다 무조건 잘한다고 할 수 없지만 아주 특수한 예를 빼곤(저를 비롯해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분들은 이 특수한 예와는 무관하다고 보셔도 돼요) 100편 동안 쌓인 경험이 재능보다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예요. 조사와 어미를 처리하는 방법, 말장난을 하나하나 고민해 온 경험, 각종 전문 용어와 표현을 적확하게 옮긴 경험, 글자 수에 맞게 위아래 줄을 조절하는 경험. 그 경험을 무시할 순 없어요. 저는 이런 경험치를 중요하게 보기 때문에 영상번역가(영화번역가)를 작가나 창작자보다 기술자에 가깝다고 보는 편이에요. 물론 이 의견은 이견의 여지가 아주아주 큽니다.

아무튼 아직 경력이 모자라는 분들은 그 얼마 안 되는 경력을 자랑하는 것보다 꾸준히 한 편, 한 편 쌓아가는 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그 수백, 수천 배를 작업하고도 묵묵히 한 편, 한 편 쌓고 있는 경력자들도 많거든요. 일단 500편만 쌓아 보세요. 경력자를 찾는 회사라면 20~30편이 아니라 최소 500편은 기준으로 보시고요. 그 정도는 돼야 경력자의 문턱은 넘은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