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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스페리아 오역 관련

서스페리아 오역 관련

<서스페리아>가 이제 종영하고 VOD 서비스를 시작해서 글을 올려요. 오역에 대한 피드백 요청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전에도 다른 글에서 말씀드린 적 있지만 작품이 한창 상영 중일 땐 제가 오역에 관해 섣불리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그 여파로 인한 데미지 컨트롤은 개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상영 중에 영화사와 논의도 없이 함부로 말씀을 드릴 수가 없거든요. 그게 프로다운 행동도 아니고요.

이슈가 된 오역은 마지막 수지의 대사 중에 “Of Anke Meier”를 “마이어 삼촌”으로 번역한 것인데요. 짐작하셨겠지만 대본이 Anke가 아니라 Uncle로 나와 있습니다.

“아무리 Uncle로 나와 있어도 내용상 Anke일 텐데 이 정도는 번역가가 알고 임의로 번역해야 하는 거 아니냐”라고 하실 수 있지만 번역가가 정식 대본을 무시하고 임의로 작업할 순 없어요. 여기부터는 소위 “시시한 어른들의 사정” 이야기인데요. 어떤 일이든 여럿이서 하는 일에는 책임 소재라는 게 있습니다. 쉽게 말해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인데 사회에선 이것 때문에라도 각자 자신이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게 미덕으로 여겨지기도 해요.

예를 들어 자막을 올리는 업체(이하 자막랩)는 번역가가 넘겨준 번역본을 그대로 똑같이 화면에 올려야 일을 잘하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간혹 자막랩에서 번역본의 자막 배열이나 오타, 심지어 오역까지 임의로 수정해서 올리는 경우가 있는데 자막 배열을 건드리면 번역가의 의도를 벗어나는 경우가 생기고 번역가가 내용상 의도한 오타일 경우, 오역이 아닌데도 건드린 경우엔 자막을 다시 올려야 하는 일도 생깁니다. 그래서 심지어 오타까지 그대로 올려주는 자막랩이 잘하는 자막랩이란 평가를 들어요. 생각하기엔 오타나 오역을 잡아주는 업체면 번역가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만 제 경험상 실수까지 그대로 올려주시는 곳이 훨씬 믿음직하고 고맙습니다. 그래야 2차 감수 때 수정하기도 좋거든요.

위와 비슷하게 번역가도 정식 대본과 들리는 대사가 다르다고 정식 대본을 무시하고 임의로 번역했다가 사고를 내는 경우가 흔해요. 아무리 내가 정확히 들은 것 같아도 섣불리 정식 대본을 무시하고 멋대로 썼다가 문제가 되면 그 책임 소재는 번역가에게 있는 거죠. 그래서라도 대본을 무시할 순 없어요. 그런데 이것도 대본마다 다르긴 해요. 어떤 작품은 정말 대본이 말도 안 되게 엉망진창일 때가 있어요. 이건 대본이 탄생되는 과정을 조금 말씀드리면 좋을 것 같아요.

각본가와 감독이 마무리한 대본이 있지만 이 대본은 영화에 나온 대사와 100% 일치하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배우들이 애드립을 치거나 대사를 조금씩 다르게 하기도 하고 나중에 편집하면서 씬이 통째로 날아가거나 교체되거나 하는 일도 많으니까요. 그래서 제작사는 마지막 편집본이 나오면 transcript를 만드는 전문 업체에 최종 대본을 의뢰하죠. 그 전문 업체에서는 제작사가 넘긴 대본을 바탕으로 최종 편집본을 보며 dictation으로 대본을 완성합니다. 여기서 간혹 문제가 생기기도 하는데요. 이런 dictation 업체가 한두 곳이 아니지만 어떤 곳은 정말 실력이 형편없어요. 최근 작업한 어떤 영화는 자막이 총 2,000개가 조금 넘었는데 제가 찾아서 정리한 틀린 대사만 200개 정도였습니다. 10%나 틀렸다는 거죠. 예를 들어 대본엔 “Give me a call”로 나왔는데 들어 보면 “duty calls”인 식이었어요. dictation 업체 별로 실력이 천차만별인데 영화의 사이즈가 클수록, 즉 제작사가 클수록 모든 자막 서비스를 한꺼번에 하는 Deluxe Digital 같은 대기업을 씁니다. 아무래도 예산 문제겠죠. 작은 스튜디오들은 제 3세계 회사에 외주를 주는 일이 많아요. 요즘 자막 업무는 인도, 방글라데시 같은 곳 외주를 많이 주거든요. 제가 제 3세계 분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에요. 저보다도 영어를 훨씬 잘하시는 분들인걸요. 그런데도 그런 작은 업체에 외주가 간 대본들은 엉망으로 올 때가 많아서 그쪽에서 온 대본이면 불안할 때가 많아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10%나 틀린 대본이면 차라리 문제를 미리 수입사에 말씀드리고 억지로 억지로 들으면서라도 작업을 해요. 그 사이에 제작사에 새 대본을 요청해서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제작사는 절대 갑이기 때문에 그런 요구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제로에 가깝습니다.

다시 <서스페리아>로 돌아와서 이 작품은 대본 오류가 전혀 없었어요. 차라리 오류가 많았으면 대본을 의심하고, 제작사에 새로 요청하고,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억지로 듣고서 수입사와 논의해 임의로 번역하는 방향을 택했겠죠. 대본 오류가 하나도 없다가 달랑 저거 하나 틀리다니. 번역가 엿 먹이는 것도 아니고… 문맥상 Uncle이 나온다는 게 희한하긴 하지만 대본에 저렇게 “Of Uncle”이라고 고유명사처럼 대문자로 나오는 경우엔 이게 뭔가 의미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커요. 영화 대본이 보통 그렇거든요. 작업 중엔 이걸 무시할 수가 없었어요. 워낙 난해한 대사가 많았기 때문에 미련하게 이것도 뭔가 있겠거니 생각할 수밖에 없었죠.

어찌어찌 첫 시사를 했고 그 시사 후 아무리 봐도 이건 오류인 것 같아서 수입사에 말씀드렸어요. 개봉 전이니까 확인해 보시고 수정이 가능하면 자막을 수정하시는 게 좋겠다고. 결국 대본 오류로 밝혀졌지만 이미 DCP를 전국 극장에 발송한 후여서 조치가 어렵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설명하기엔 지식이 부족한데 간략히 말씀드리면 영화는 Digital Cinema Package라는 디지털 형식으로 각 극장에 발송합니다. 이 과정에서 저 Package를 풀고 싸고 상영 권한을 재요청하고 또 설정하고 하는 부분이 복잡해요. 비용도 다시 발생하고요. 그래서 이미 발송된 DCP의 자막을 다시 수정하기는 물리적으론 가능해도 현실적으론 어렵습니다.(아이맥스는 조금 달라요. 이쪽은 수정된 걸 제가 본 적 있거든요. 저도 궁금한 부분이라 한번 취재해서 글을 써볼게요) 그래서 저도 2차 판권부터는 확실히 수정해서 서비스하신다는 확인까지만 듣고 종영하면 글을 쓰자 하고 있었어요.

여기까지가 길고 구질구질한 제 변명(?) 이었습니다. 사실 무슨 변명할 거리가 있겠어요. 제 잘못이지. 저도 오역을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지만 이런 케이스는 처음이라 정리해봤어요. 사소한 실수까지 다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말씀드릴만한 오역일 경우엔 피드백 글을 쓰겠다고 약속하기도 했었고요.

오역이 나오면 그 책임이 여럿에게 있긴 해요. 위에 말씀드린 부분 중 어느 단계에서 삐끗해서 나올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가장 크고 근본적인 책임은 번역가에게 있습니다. 사실 번역가에게 맡겨진 책임은 오로지 “제대로 된 번역본을 만들 것” 하나뿐이거든요. 상황이 어쩌니 해도 제 책임이 아니라고 발뺌할 수가 없는 성격의 일이에요. 온전히 제 책임입니다.

<서스페리아>는 정말 흔치 않은 경우이긴 하지만 더 의심하고 진작 말씀드려서 수정할 것을… 하는 후회가 있어요. 워낙 흔치 않은 케이스라 다음에도 똑같은 종류의 오역을 내지 않는다고 장담할 순 없지만 이번에 뼈저리게 느낀 게 있어서 앞으로는 이런 케이스도 각별히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관람에 지장을 드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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