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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 번역 후기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 번역 후기

찰스 디킨스의 소설 <Great Expectations>는 보통 “위대한 유산”으로 번역되지만 한편에선 “막대한 유산”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great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인데요. 뭐가 맞다고 주장하기는 어렵고 내용상 둘 다 일리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제목의 묘미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여기서 재밌는 건 great만이 아니라 Expectations도 해석의 여지가 있다는 점이에요. “유산”으로 번역되지만 “기대”로 번역되기도 하니까요. 위대한 유산, 막대한 유산, 커다란 기대, 막대한 기대, 위대한 기대 이런 해석이 모두 가능합니다.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에서도 <Great Expectations>가 아주 여러번 등장해요. 선생님이 과제로 에세이를 써오라고 내주는 작품이 <Great Expectations>인데요. 마일스는 “Great Expectations”라는 제목만 보고도 한숨을 쉬곤 합니다. 이유가 뭘까요? 과제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현재 아빠가 자신에게 거는 기대에 짓눌린 상황이기 때문이에요. “막대한 기대”에 숨통이 조이는 아이. 어떻게든 그 기대를 벗어나고 싶어하는데 아무리 삼촌에게 푸념을 늘어 놓아도 이런 답답한 상황은 해결되지 않죠. 게다가 나중엔 스파이더맨이라는 책임까지 어깨에 더해졌으니 그 기대와 부담이 마일스를 많이도 괴롭혔을 거예요.

 

 

로 저번 포스팅과도 관계 있는 말인데 번역가가 연출자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게 반복 어휘, 표현이에요. 연출자가 캐릭터의 입, 혹은 상황을 이용해 반복적으로 하는 말이 무엇인가.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에서는 위에 쓴 “Great Expectations”와 choice(선택)라는 단어예요. 마일스는 막대한 기대(Great Expectations)에 짓눌려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삶을 선택(choice)하지 못하죠. 등교 장면을 보면 마일스가 일부러 한쪽 신발끈만 풀고 다니는데 친구가 끈 풀렸다고 말해주자 “나도 알아, 내가 선택한 거야(Yeah, I’m aware. It’s a choice)”라고 말합니다. 다른 건 못 하지만 신발끈을 풀고 다니는 것만이라도 자신의 뜻대로 선택하고 싶은 거예요. 아마 평소 같으면 저런 대사는 “알아, 내 맘이야”로 번역했을 거예요. 구어답지 않은 자막을 아주 싫어하거든요. 이 작품에선 반드시 “선택”이라는 키워드를 써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문어체 같아도 사용했어요. 이런 예가 종종 있어요. 피터가(죽은 피터) 마일스에게 조만간 이것저것 가르쳐주겠다며 “show you the ropes”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이 표현은 원래 “일하는 요령을 가르쳐주다”라는 뜻이에요. 자막은 “밧줄 타는 법을 가르쳐주겠다”로 나갔죠. 이런 것들도 연출자와 작가가 “teach some stuffs” 같은 일상적인 말을 쓰지 않고 굳이 저 표현을 쓴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rope와 스파이더맨, 이 두 단어에서 연상되는 건? 잘 아시겠지만 web swinging이죠. 작품의 마지막에 가면 마일스는 피터가 딱 한번 보여줬던(show) 거미줄 타기(web swinging)를 그대로 재현해내면서 피터에게 배운 후계자임을 스스로 보여주는데요. 이런 연출 장치들 때문에라도 직역처럼 써야 할 때가 있어요. 가능하면 각본을 쓴 작가나 연출자의 뜻에 가깝게 쓰려고 노력하는 거죠. 이 표현도 번역이 이게 뭐냐고 번역가가 “show you the ropes”가 뭔지도 모르냐고 욕설 메시지를 보낸 분도 계셨어요. 일일이 설명할 순 없어서 답답하지만 영상번역에서 한번에 직관적으로 전달이 안 됐다면 일부는 번역의 실패라고 봐야 해요.

말이 옆으로 샜는데 저는 개인적으로는 이 두 표현이(Expectations, choice)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이 영화가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스파이더맨이 되는 것은 선택받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 즉, 남들의 기대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 인생의 주체가 되라는 것이니까요.

 

 

일스는 삼촌과 그래피티를 그리러 가서는 no expectations이라고 쓰죠. 내 인생에 섣부른 기대, 너무 큰 기대를 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이게 아니었을까요? 솔직히 이걸 번역하기가 아주 까다로웠는데 최초 시사하고서 며칠 한숨이 푹푹 나온 표현이었어요. 아무것도 안 떠올라서요. 제일 중요한 문장이라고 판단했다면 그 메시지를 살려야 할 텐데 그렇다고 “위대한 유산”으로 널리 알려진 <Great Expectations>에서 오는 PUN(말장난)의 뉘앙스를 안 살릴 수도 없거든요. 결국 번역은 “기대하면 오산”으로 나갔어요. 말장난은 “유산, 오산”으로 채우고 “기대”라는 의미를 살려준 건데요. 워낙 순식간에 지나가는 자막이라 잘 못 보셨을 수도 있지만 이 두 표현의 말장난이었어요.

위대한 유산(막대한 유산)

기대하면 오산

마일스는 “no expectations”라고 그래피티를 써놓고 후련한지 기분 좋게 웃죠. 그 표정이 지금 생각해도 참 좋아요. 자막이 너무 빨리 지나가서 저 의미를 한 번에 잡아내지 못하신 분들은 다시 한번 관람하시면 더 재밌을 거예요.

 

사족: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는 정말 애착이 가고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번역하면서 고생도 많았는데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오타가 두 군데 있어요. 시사 나가고서 깜짝 놀랐… 굳이 핑계를 대자면 제가 이 작품은 proofreading을 응급실에서 핸드폰으로 했거든요. 차를 몰고 가다가 다른 차가 제 운전석을 수직으로 들이받아서 차가 반파되는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응급실에 누워 있었어요. 아마 로빈후드 GV 오셨던 분들은 아실 텐데 제가 GV 가면서 사고를 당했어요.

마지막에 스탠 리 쿠키와 함께 몇 장면이 추가되면서 전체적으로 내용 변동이 조금 있었는데 집에서 후딱 수정하고 곧장 응급실에 누워서 최종 확인을 -_-…  응급실에 있는데 최종 확인이 올 줄은 몰랐어요. 이렇게 큰 작품들은 거의 실시간으로 작업이 이루어져요. 제가 수정하자마자 해외에 넘기고 왔다갔다 하고 정신이 없죠. 그런 급박한 스케줄에선 회사 분들도 일일이 확인해주실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라도 제가 더 꼼꼼히 봐야 하는데 ㅠㅠ. 앞으로 더 꼼꼼하게 확인해서 작업하겠습니다. 다음 작품에서 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