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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C 번역 후기

PMC 번역 후기

한국 영화 번역 후기를 쓰는 날이 올 줄이야…

음 PMC 의뢰가 들어왔을 땐 살짝 당황했어요. 한국 영화에서 외화 번역가를 찾을 일이 뭐가 있을까 해서요. 대화의 상당 부분이 영어라고 그 부분의 자막을 부탁하시더군요. 저야 일을 가리는 사람도 아니고 흥미로운 작업 같아서 의뢰를 받았습니다. 이 대본이 탄생한 순서는 아래와 같아요.

김병우 감독님이 집필한 한글 시나리오 -> 영어 대사로 나갈 부분을 한영 번역가가 영어로 번역 -> 그 영문 대사 부분을 제가 번역.

예상한 대로 영문 대본은 평소 작업하는 정식 외화 대본과 다르게 엑셀로 만들어져 조악한 편이었고 영상 편집과 CG가 덜 된 상태였기 때문에 어느 장면의 대사인지 확인할 수 있게끔 콘티처럼 작은 스틸이나 스케치 이미지가 붙어 있었어요. 당연히 작업하기가 쉽지 않았죠. 외화도 그렇지만 편집이 덜 끝난 영상을 번역할 때는 대사간 개연성이 떨어지는 장면이 종종 있습니다. 갑자기 문맥과 다르게 엉뚱한 대사가 튀어나온다거나 하는. 그래서 번역하면서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걱정은 안 했어요. 왜냐면 감독님과 연락을 취할 수 있으니까 직접 여쭤보면 되거든요. 연출자에게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볼 수 있다니 이건 영화 번역가 입장에서 오픈북으로 보는 시험과 비슷해요.

1차 번역을 마치고 넘긴 후에 제작진 측에서 번역본을 감수하고 연락을 주셨어요. 감독님이 직접 연락을 주셨는데 말씀하시는 태도가 굉장히 조심스러워서 뭔가 말씀하시기 어려워하시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결론은 번역문에 당신의 의도와 다른 부분이 여러 곳 있다는 말씀이었는데 전혀 불쾌하거나 놀라거나 하진 않았어요. 제가 예상한 반응 그대로였거든요. 내 글의 의도를 100% 그대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면 번역가가 아니라 독심술사죠. 그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어서 스태프분에게 최초 번역본을 넘기면서도 당부 말씀을 드렸어요.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대사와 많이 다를 테니 거리낌 없이 감수 의견을 주시라고.

번역가들은 보통 번역본을 넘기고 영화사에서 내 뜻과 너무 다른 피드백들을 잔뜩 주면 내심 불편해합니다. 이건 번역가만이 아니라 뭔가를 의뢰받아서 결과물을 납품하는 직업을 가진 분들은 다 마찬가지일 거예요. 일러스트레이터도 그렇고 디자이너도 그렇고 개발자도 그렇고. 저도 8~9년 전쯤 커리어 초기에는 클라이언트의 피드백 때문에 감정 싸움을 벌인 적도 꽤 많아요. 클라이언트와 감정 싸움을 벌이는 건 프로가 해선 안 될 짓 TOP5에 들어갈 정도로 바보 같은 짓이긴 한데… 뭘 모를 때고 의욕도 과할 때라 지금 생각하면 그저 이불킥일 뿐이죠. 지금은 최대한 프로답게 의견을 나누고 반영하는 편이에요. 클라이언트와 번역가가 서로를 존중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이 내용은 굉장히 길 것 같아요. 따로 포스팅을 하나 할게요.

당신도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분이라 그런지 타인의 결과물에 피드백을 전하시는 게 조심스러우시길래 저도 솔직하게 말씀드렸어요.

“나는 작품을 재창조하거나 재해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연출자의 의도를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전달자다. 연출 의도와 다르게 번역된 대사가 있다면 작은 거라도 다 말씀을 주시라. 전부 반영해서 최대한 자막답게 다듬어 드리겠다.”

제 번역문을 유지해야 하네 어쩌네 고집을 피울 이유가 1%도 없는 작업이라서 오히려 마음이 편했습니다.  감독님 의도대로 전달할 수만 있으면 그게 최고거든요. 토를 달 것도 없었죠.

 

떤 말씀을 하시는지 들어보니까 최초 집필한 시나리오의 대사와 자막의 뉘앙스가 다르다는 거였어요. 당연하죠. 시나리오의 대본은 완전 구어체로 쓰셨는데 자막은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 구어와 같은 뉘앙스를 내긴 어렵거든요. 저는 “귀로 들리는 자막” 같은 뜬구름 잡는 꿈을 갖고 있는 번역가라 자막을 최대한 구어체로 쓰려고 노력해요. 그런 시도가 늘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방향은 그렇게 잡고 있어요. 그런데도 한국어 시나리오의 구어체와는 비교할 대상이 아닌 거죠. 처음에 의뢰받으면서도 그 걱정이 가장 컸어요. 분명 한국어로 대본을 쓰셨을 텐데 남의 손을 한번 거쳐서 나온 한국어 자막에 과연 만족하실까 하는.

예를 들어 존하대 설정 같은 것도 제가 쓴 것과 감독님이 쓴 게 달랐어요. 에이헵과 맥켄지의 존하대, 에이헵과 부하들의 존하대 설정에서 차이가 조금 있었죠. 저는 자막을 쓸 때 남녀가 공적인 사이거나 부부라면 상호존대나 상호하대를 원칙으로 합니다. 물론 내내 존대만 쓰거나 하대만 쓰진 않아요. 상호존대라도 상황에 따라 한두 마디 놓기도 하고, 상호하대라도 비아냥대거나 할 때는 존대를 쓰기도 하죠. 에이헵과 맥켄지도 평소엔 상호존대를 쓰되 긴박한 상황이나 감정이 격한 상황에서는 둘 다 한두 마디씩 반말을 하는 설정으로 작업했어요. 그런데 감독님은 그것보다 조금 더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죠. 에이헵이 워낙 거친 인물이고 설정한 캐릭터도 그렇고 해서 윗사람에게 엉기는(감독님의 정확한 워딩에 따르면) 어투를 쓰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결과물은 에이헵이 맥켄지에게 존대를 하긴 하지만 반말을 꽤 많이 쓰는 자막이 됐습니다. 저는 둘의 관계를 조금 다르게 봤지만 전달자인 제 시각보다는 연출자의 설정과 의도가 중요하니까요.

결국 피드백을 받고 또 제 의견을 드리고 하는 과정에서 이메일로는 한계가 있어서 직접 뵙고 미팅을 하기로 했어요. 사실 자막 때문에 미팅을 하는 예는 극히 드뭅니다. 1년에 두 번이나 있으려나. 모든 과정을 전화와 이메일로 진행해요. 저도 일정으로 정신이 없을 때였고 PMC 측도 편집이며 믹싱이며 CG며 진짜 바쁘실 때라 간신히 일정을 맞춰서 저녁 8시에 미팅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쭉 보면서 의견을 나눠도 3시간이면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보통 자막 미팅이라고 하면 그 정도면 끝나니까요.  웬걸… 새벽 2시까지 미팅을 했는데 대본을 반도 못 봤습니다. 첫 자막부터 하나하나 전부 재생하면서 의논했으니 놀라울 일도 아니죠. 정말 꼼꼼하셨어요. 조사를 “은”으로 쓸지, “을”로 쓸지도 저랑 하나하나 의논하실 정도였으니까요.

원래 일정대로라면 저도 그렇고 감독님도 그렇고 이틀씩 시간을 빼서 자막 미팅을 할 수는 없었어요. 그런데 하다 보니까 여기서 끊으면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그래서 다음 날도 억지로 시간을 내서 미팅을 시작했어요. 감독님은 1시간 반 안으로 완료한다고 호언장담하셨으나 결국 새벽 4시가 넘어서 끝났습니다. 하도 안 끝나니까 걱정돼서 잠도 못 자고 있던 아내가 새벽에 전화를… 감독님 바꿔드려서 감독님이 양해를 구하시는 해프닝도;; GV에서는 감독님이 저를 붙들고 안 놔주셨다고 하셨던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요. 원래 제작진 측에서는 최대한 미팅을 시간 안에 마치고 보내주시려고 노력하셨어요. 그런데 그냥 꼭두새벽에 들어갈 각오하고 왔다고 어차피 할 거 꼼꼼히 하자고 말씀드리고 제가 붙어 있었어요. 자발적인 인질로 잡혀 있었달까. 글을 쓰다 보니 스톡홀름 신드롬 같은 기분이 드네요. 붙잡혀 있다 보니 정 들어버린 케이스?

 

실 그렇게 쫓기는 일정에서 이틀이나 새벽까지 남아 있었던 건 개인적으로도 배우는 게 많았기 때문이에요. 내가 번역한 영화의 연출자와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자막을 하나하나 의논할 수 있는 기회는 정말 흔치 않으니까요. 첫날부터 감탄의 연속이었습니다. “연출자는 대사를 이렇게 쓰는구나”, “이런 자막을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이런 아이디어도 있구나”. 자막의 특성이 낯선 연출자가 자막 제작 단계에서 주는 아이디어들은 정말 엄청난 영감이 됐습니다. 발상 자체가 너무 신선했어요.

자막을 다루는 사람은 자막이 떴다가 사라지는 시간이라거나, 자막의 길이, 문장부호 사용, 주어와 대명사와 조사를 생략하는 기술, 어미 변형, 줄바꿈 위치, 심지어는 자막의 형태 등, 의외로 여러가지를 신경 쓰고, 또 그것들을 효율적으로 다듬을 기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기술은 대부분 경험으로 축적하는 것이죠. 연출자는 대본을 쓰지만 자막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자막을 다듬는 기술도 없을 뿐더러 막상 자막을 써야 할 때 저런 요소들을 고려하기가 쉽지 않아요.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영어 대사 자막이 종종 어색하고 길고 비효율적으로 나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전문 외화 번역가의 손으로 다듬지 않고 연출자나 작가의 대본을 그대로 자막으로 올리기 때문이에요. 이번엔 그런 것들을 피하고자 전문 번역가를 고용하신 거였죠.

그건 어쨌든 자막 기술에 관한 이야기고, 자막의 내용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자막 지식이 거의 없는 연출자가 주는 아이디어의 질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훌륭했어요. 제가 떠올려본 적도 없던 자막 아이디어들이 쏟아지더라고요. 그 결과물은 아주 만족스러웠다고 생각해요. 어떤 자막들은 제 스타일이 아니기도 하고 제가 지향하는 바와 다른 면도 있지만 이럴 때가 아니면 시도해 보지 않을 것들이라 신선하고 재밌었어요. 가령 영어에는 말이 끝날 때 상대에게 “그렇지?” 혹은 “안 그래?”라고 되묻는 의도에서 “right?”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자막에서 굳이 매번 저걸 살리진 않아요. 반드시 되물어야 하는 뉘앙스라거나 장면에 필요하지 않는데도 굳이 자막 모양을 망치면서까지 끼워넣진 않거든요.

어젠 간만에
정말 즐거웠어, 그렇지?

어젠 간만에 정말 즐거웠어
그렇지?

대사에서 이런 “right?”은 백이면 백 앞문장과 붙여서 읽기 때문에 자막을 분리해서 따로 쓰기도 애매한데 그렇다고 위와 같이 쓰기에도 자막 모양이 예쁘지 않습니다. 영화 번역가드은 문장 중간에 쉼표가 들어가는 걸 아주 싫어해요. 정보를 나열할 때 쓰는 쉼표는 괜찮지만 두세 문장을 쉼표로 연결하는 일은 피하려고 하죠.

그래서 저는 이런 경우 저 대사 뒤에 따라오는 상대 캐릭터의 대사를 보고 결정해요. “그렇지?”가 실제 의문문으로 기능했을 때는 꾸역꾸역 어떻게든 “그렇지?”를 쓰고 아닐 경우 “그렇지?’라는 자막을 보통은 뺍니다. 김병우 감독님은 역시 한국어 시나리오를 쓰시는 분이라 최대한 자막을 구어에 가깝게 하고 싶어하셨어요. 이런 문장도 “right?”이 빠지면 어색하게 느끼셨죠. 그런 부분은 구어답게 “어?”로 쓰자고 하셨어요.

맛있지? 어?

예를 들어 위와 같은 자막.  저 혼자 하는 작업이면 저렇게 쓰지 않는 편이라서 어색하긴 한데 생각해 보니 낯선 수준이 아니라 “어?” 자체를 써본 적이 없더라고요. 이런 것들도 재밌었고 대사의 마지막을 종결형으로 쓰지 않는 형태가 몇 있었는데 제가 평소에 쓰던 스타일보다 훨씬 구어답고 효율적이고 경제적이었습니다. 참 많이 느끼고 배웠어요.

 

기 내용은 제가 신기했던 것들이고 감독님은 제가 긴 자막을 싹뚝싹뚝 가지 치는 장면을 신기하게 보셨어요. 번역가에겐 워낙 기본적이고 흔한 기술이라 사실 별거 없는데 대사를 저렇게 줄이면서도 뜻 전달이 다 되는구나 하고 신기해 하시더라고요. 감독님은 이렇게 다듬어진 대사들을 득템이라고 부르셨어요. 몇몇 장면은 배우들이 대사를 빠르게 하고 대사량도 많은데 관객들이 그 정보들을 다 알고 지나가야 하는 장면이라서 편집을 일부러 루즈하게 하셨다고 이렇게 줄이는 방법이 있는 줄 알았으면 거기도 편집할 때 스피드 있게 나갔을 거라고 아쉬워 하시더라고요. 작품에 영어 자막을 많이 사용할 연출자라면 자막 기술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것도 제작 단계에서 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틀이나 같이 작업하다 보니 나중에는 감독님이 저보다도 가지치기를 훨씬 잘하셨고 심지어 줄바꿈 위치도 거의 완벽히 잡으셨어요. 그 과정을 보면서도 보통의 영화 번역가들과는 접근 방식이 많이 달라서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감독님과는 대화가 잘 통했어요. 둘 다 에반게리온을 좋아한다거나 하는…(갑분오덕인증 -_-) 그런 잡담만 안 했어도 훨씬 일찍 미팅을 마치고 집에 갈 수 있었을 텐데 여보, 미안해요. 감독님이 저보다 딱 한 살 젊으시더라고요. 세대 차이가 안 나다 보니까 대화도 편하고 감독님이 그 자체로도 재밌는 분이셨어요. 너무나 즐거운 작업이었고 즐거운 것 이상으로 얻은 게 정말 많은 작업이었어요. 이번에 느낀 점들은 앞으로 제 커리어에 녹일 기회가 많을 것 같아요. 감사했고 많이 배웠습니다. PMC와 김병우 감독님의 선전을 기원하겠습니다.

 

PS.
병들이 나오는 영화인만큼 대사에 비속어도 꽤 나오는 편인데 아마 자막에 나온 비속어들을 보고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셨을 거예요. “욕쟁이 번역가의 자막이라 역시…” 아닙니다. 제가 욕쟁이 번역가라 비속어가 잔뜩 들어간 게 아니라 그 비속어의 상당 지분은 감독님에게 있습니다. 제가 자막을 이렇게 쓰면 욕쟁이 번역가가 욕 자막 썼다고들 할 거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럼 번역가님에게 모두 덮어씌우겠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감독님에게 덮어씌우겠다고 서로 합의를 봤습니다. 저 욕 못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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