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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영화의 흥행에 영향을 미칠까요?

번역은 영화의 흥행에 영향을 미칠까요?

며칠 후면 <보헤미안 랩소디> 관객 수가 725만 명을 넘을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관객분이 이런 메시지를 보내 주셨어요. “725만이 넘으면 번역가님의 개인 흥행 기록인 <스파이더맨: 홈커밍>을 넘어요”라고. 저는 생각도 못 하고 있던 기록인데 그래도 막상 듣고 보니 슬쩍 기분이 좋네요. 평소에 “흥행하는구나!”까지만 생각하지 그 뒤는 별 생각이 없어요.  초대박이 난다고 해서 인센티브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

제가 이 얘길 왜 꺼내냐면 “번역과 흥행의 상관관계가 실제하는가”에 관한 글을 쓰고 싶어서예요. 오래전부터 쓰고 싶었는데 쓰려고 할 때마다 번역 이슈가 있어서 엉뚱한 문맥으로 읽힐까봐 못 쓰고 있었어요.

 

번에 <보헤미안 랩소디> 얘기가 나오면서 좋은 계기다 싶어 써봐요. <보헤미안 랩소디>가 흥행하면서 연락을 많이 받았어요. 인터뷰 요청도 많았고 방송 출연, 심지어 실시간 방송 전화 인터뷰 요청도 몇 건이 있었어요. 대부분 영화 흥행에 번역의 공이 크다고 말씀하시면서 출연을 요청하신 건데 죄송하지만 모두 고사했습니다. 고사하면서도 하찮은 이름값 가지고 괜히 유난을 떠는 것 같아서 더 죄송스러웠어요. 이 글을 빌어 불러주셨던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하고 또 죄송합니다. 다른 분들은 몰라도 저는 번역이 흥행에 미치는 영향이 어떤지를 알기 때문에 거기 나가서 뭐라고 말을 할 자신이 없었어요. 지금 써내려갈 이야기의 결론과도 상관이 있는 결정이었는데 이 글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번역은 영화 흥행과 거의 무관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완전히”가 아니라 “거의”라는 거예요. 완전히 무관하다고까지 할 순 없거든요.

 

객들이 영화 번역을 “인지”하게 된 건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인지”라는 표현은 단순히 문자를 인지한다는 게 아니라 번역의 질을 인지하게 됐다는 뜻이에요. 그 전에도 소수의 관객과 평론가들이 영화 번역의 질을 따지기도 했고 간혹 이슈가 된 번역들도 있었지만 그래봐야 소수 의견이었고 영화 번역 질에 관한 담론은 거의 없다시피 했죠.

근 몇 년 새 영화 번역의 질을 논하는 관객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거예요. 관객들의 외국어 실력이 급격히 상승한 것도 있을 것이고 해외 대중 문화에 관한 관심이 전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번역가에겐 피가 마르는 추세이긴 하지만 번역에 관한 담론이 많아지는 것 자체는 나쁜 방향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담론의 방향이 조금 우려되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것도 결국은 생산적이고 더 나은 방향으로 진행될 거라고 믿고 있고요.

 

시 번역과 흥행 얘기로 돌아와서 제가 단정적으로 번역과 흥행이 무관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이유는 수치상으로 너무 명백히 나와 있기 때문이에요. 좋지 않은 자막의 영화가 엄청난 흥행을 하는 일도 많고, 정말 좋은 자막의 영화가 흥행의 ㅎ 냄새도 못 맡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지금은 VOD로 영화를 보면 집에서도 극장 자막을 그대로 보실 수 있지만 단 몇 년 전만 해도 VOD는 극장 자막이 아니라 다른 번역가가 새로 작업한 자막이었어요. 지금은 극장 자막이 판권이 넘어갈 때 통째로 넘어가기 때문에 저도 제 자막이 어디에 쓰이는지 모릅니다.

당시엔 극장 자막을 극장에서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저는 다른 번역가들의 자막을 공부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극장에 가야 했어요. 특히 제가 좋아하는 번역가의 자막은 무조건 극장에서 챙겨봤죠. 그때가 아니면 다신 어디서 볼 수가 없으니까요. 정말 자막이 좋으면 두세 번씩 관람하면서 노트에 적어 오기도 했죠. 그런데 그렇게 좋은 자막이 입혀진 영화도 자막과 무관하게 흥행에서 참패하는 일이 허다했어요.

반면에 정말 엉망인 자막을 보게 되는 일이 드물게 있는데 극장 번역을 업으로 하는 프로 번역가가 작업한 것이 아니라 번역 회사에서 작업하는 경우에 그런 자막이 종종 나옵니다. 애초에 수입사에서 번역료를 아끼기 위해 극장 번역가가 아니라 케이블TV 번역을 하는 영상 번역 업체에 의뢰하고 그 업체에서 번역가를 섭외하는 케이스예요. 물론 케이블TV 번역을 하는 번역가 중에서도 솜씨가 훌륭한 분들이 계시지만 이런 케이스엔 번역가의 실력 말고도 여러가지 매개변수가 있습니다.

영상 번역 업체에서는 내근직으로 감수자를 두는데 번역 감수의 강도가 워낙 강해서(강하게 말하자면 자막을 워낙 심하게 난도질하기 때문에) 번역가의 자막이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여기까지만 하면 다행이지만 그 자막이 수입사로 올라가면 수입사 내부에서 또 감수 과정을 거쳐 자막에 손을 굉장히 많이 댑니다. 이때도 자막이 한 차례 무너집니다. 물론 최초 영상 번역 업체에 있는 감수자의 실력이 아주 좋고, 거기에 수입사 내부에서 감수한 직원의 실력까지 아주 좋다면 볼만한 자막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아귀가 맞을 확률은 희박합니다. 그리고 번역 업체에서는 마진을 남겨야 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낮은 단가의 번역가를 고용합니다. 업체 마진을 0%로 하면서까지 실력 좋고 비싼 번역가를 쓰는 업체는 없죠. 그건 회사가 아니라 덕후 모임이나 자선단체니까요.

이래서 첫째, 번역가의 질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다. 둘째, 번역 업체 감수에서 최초 번역이 많이 훼손된다. 셋째, 수입사에서 최종 감수를 하며 번역이 거의 원래 모습을 상실한다. 이 과정에서 제대로 된 자막이 나온다고 상상하긴 어려울 거예요. 수입사에서 번역가에게 직접 의뢰하는 경우엔 번역가의 의견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견이 있어도 논의를 할 망정 자막을 내부에서 임의로 고치는 일은 아주 드뭅니다.

이렇게 구구절절 길게 쓴 이유는 심지어 이런 자막을 입힌 영화도 200만, 300만 명 관객을 동원한 예를 자주 보기 때문이에요. 프로 번역가들의 눈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자막인데 딱히 자막 클레임도 없고 영화는 쑥쑥 잘됩니다. 자막이야 어떻든 영화가 좋기 때문이에요. 관객을 끌만한 영화라는 거죠. 배급 상황이나 경쟁작 같은 요소도 중요하게 작용하고요.

 

런 예들을 자주 보다 보면 번역이 영화 흥행에 미치는 영향이 아주 작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개인적으로도 번역이 흥행에 미치는 영향은 영화 외적인 요소들, 가령 예고편이나 포스터, 마케팅, 바이럴, 배급 등 이런 것들보다도 훨씬 뒤에 가 있다고 생각해요.

<데드풀>이나 <킬러의 보디가드> 같은 작품들을 하면서 번역이 흥행에 일조했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제 번역이 흥행에 일조했다고 진심으로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제 번역이 아니었더라도 흥행할 작품들이었다는 거죠. 물론 번역이 재밌어서 반복 관람을 하시거나, 번역 자체에 흥미가 있어서 보러 오신 분들도 계실 거예요. 지금도 제가 번역한 작품이라고 찾아서 보시는 분들이 계세요. 종종 메시지를 보내주시거든요. 그런 분들은 번역을 공부하는 번역학도거나, 영화 번역가가 꿈이거나, 그냥 영화 번역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예전에 제가 극장을 찾아다니면서 좋은 자막을 공부했던 것처럼 자막 자체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죠. 그런데 이런 분들이 얼마나 되시겠어요. 억지로 최대로 잡더라도 한 100명 되실까요?

“아니다, 번역 덕에 재밌었다”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 자막이 아니었어도 재밌고 흥행할 작품들이었어요.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제가 번역하지 않았다고 해서 <데드풀>, <킬러의 보디가드>, <스파이더맨: 홈커밍> 같은 작품들이 흥행하지 않았을 거라고는 상상하기가 어려운데요. 제 자막 아니어도 보셨을 거잖아요. 🙂 겸손을 떠는 게 아니라 실제로 수치가 그렇고 영상번역가로 10여 년을 살아온 입장에서 보기에도 그래요. 저는 겸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거든요.

“그럼 왜 수입사에선 비싼 돈을 들여가며 실력 있는 번역가를 써야 하나?”라고 물으실 거예요. 아주 논리적으로 100% 타당한 질문이에요. 흥행과 별 상관도 없는데 뭐 하러?

이 질문에 관한 답은 다음 글에 적어 볼게요. 슬슬 쓴다 하고 쓴 건데 뭐 벌써 이렇게 길게 썼지… 쓰다 보니 글질에 빠져서 일을 못 하고 있어요. 다음 글에선 “그래도 돈을 더 쓰더라도 좋은 자막을 입혀야 한다!”라는 논지로 글을 쓰고 싶은데 과연 그게… 될까요? 🙂

결론: <보헤미안 랩소디>의 흥행은 그냥 퀸이 쩔어서인 걸로. 마케팅, 배급, 포스터, 예고편 등등등 흥행의 공신들이 정말 많아요. 사실 생각과 다르게 번역은 쩌~~~ 뒤에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