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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 랩소디 – 번역 피드백

보헤미안 랩소디 – 번역 피드백

원래 번역 관련 글은 작품이 종영할 때쯤 올리는 편입니다. 괜히 예상 못한 이슈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까요. 이 글도 3주차쯤 올리려고 진작 써놓은 글인데 어째 종영할 기색도 없고 어제 개봉한 것처럼 이렇게 화력이 엄청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래도 5주차니 올려도 괜찮겠다 싶어 공개합니다.

 

가 이메일로(feedback@drugsub.net) 관객들의 피드백을 받고 있는 건 아실 거예요. 보랩도 상영 초부터 이런 저런 질문과 피드백이 많이 왔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많은 내용이 아래 두 가지예요.

왜 performer를 musician이라고 번역했나?

Freddie Fucking Mercury에서 Fucking은 왜 뺐나?

대부분의 관객은 저 두 가지 질문의 답이 뭔지 이미 짐작하실 겁니다. 심지어 저 질문을 하신 분들도 번역가의 입으로 듣고 싶으신 거지 왜 저렇게 번역했는지는 거의 짐작하고 계실 거예요.

첫 번째, “퍼포머”(performer)를 “뮤지션”이라고 옮긴 이유는 짐작하신 대로 낯선 용어이기 때문이에요. 그나마 “뮤지션”은 오래 사용돼서 음차로 옮겨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가 됐지만 “퍼포머”는 음차로 옮겨놓으면 저게 뭔가 싶을 정도로 단어 모양조차 생소합니다. 어디서든 한국어로 “퍼포머” 이런 표현이 적혀 있는 글을 보신 경험이 아주 드물 거예요. 해당 자막의 duration(떴다 사라지는 시간)이 1.3초 가량임을 생각할 땐 그것보단 직관적인 표현을 선택하는 편이 좋습니다. 쉽게 말해 아래와 같이 쓰여 있는 자막이 1.3초 안에 떴다 사라진다 했을 때 그 안에 의미가 머리에 들어오는가에 대한 문제예요.

걔 뮤지션이래

걔 퍼포머래

한국의 대표적인 퍼포머라고 하면 이승환 씨나 싸이 씨를 꼽을 거예요. 하지만 저 두 분을 가리켜 한국어 음차로 “퍼포머”라고 쓰는 것도 저는 본 기억이 없는 것 같아요. 있다고 해도 아주 드물고 오히려 뮤지션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죠. 그런 면에서 보면 한국에서는 “뮤지션”이라는 외국어가 퍼포머, 싱어송라이터, 보컬 등 아주 다양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최근에 퍼포머라는 말이 뉴스에 쓰인 걸 본 것은 “BTS”가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 퍼포머로 초청을 받았다는 소식이었어요. 이런 소식이 더 많아진다면 언젠가 한국에서도 음차로 “퍼모머”로 쓰는 게 어색하지 않은 일이 되겠죠.

제가 케이블 TV 번역만 하던 시절에는(7~8년 전) “루저”라는 단어를 음차로 자막에 쓰는 일이 거의 없었어요. 그대로 쓰면 번역 회사나 채널에서 다시 “패배자”로 바꿨죠. 많이 쓰지 않는 말이라서 어색하다는 이유였어요. “루저”와 “패배자”는 뉘앙스가 꽤 다른 면이 있어서 저렇게 옮기면 안 되는 일도 많지만 저때는 울며 겨자먹기로 “패배자”라는 표현을 써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케이블 TV든 OTT 서비스든 극장 자막이든 “루저”라는 자막이 아주 흔하게 쓰이죠. 요즘 시대는 그때보다 “루저”라는 말이 일상이나 미디어에서 훨씬 흔히 쓰이고 익숙하기 때문이에요.

“퍼포머”도 비슷한 예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저도 귀로 들리는 것과 자막 사이에 괴리감이 생기는 걸 질색하는 편인데 이럴 땐 못마땅해도 그 안에서 제 나름의 선택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큰 걱정 없이 “퍼포머”로 쓸 수 있는 날이 어서 오면 좋겠어요.

한국어로 번역을 하려 해도 performer를 옮길 수 있는 말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공연인? 예술인? 무대인? 어떤 걸 써도 의미가 축소되거나 용어가 낯설어서 좋은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두 번째, Freddie Fucking Mercury에서 Fucking은 왜 뺐나.

국에서 영화를 심의할 때는 주제, 선정성, 폭력성, 공포, 약물, 대사, 모방위험 이렇게 7개 부문을 평가합니다. 이 7가지 중에 하나라도 청불이 나오면 그 영화의 심의 등급은 청소년관람불가가 됩니다. 아시다시피 <보헤미안 랩소디>는 12세 영화인데요. 대사에 Fucking이 들어갔다고 해서 12세, 15세 등급을 목표로 하는 영화에 함부로 과격한 욕 자막을 쓴다거나 할 수가 없습니다.  대사 부문에서만 청불이 떠서 영화 등급이 청소년관람불가가 나오면 그건 번역가의 실수 정도가 아니라 대형 사고가 됩니다.

“미국에선 Fucking을 쓰고도 PG-13을 받았는데 한국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욕을 써야 하는 거 아니냐”라고 묻는 분들도 계시지만 미국과 한국은 심의 성향이 다릅니다. 미국은 MPAA(Motion Picture Association of America)의 심의 기준에 명시만 안 돼 있을 뿐이지 암묵적으로 용인되는 비속어 사용 횟수가 있어요. 가령 PG-13엔 fuck은 2회, shit은 2회까지 사용할 수 있죠. PG-13 영화를 잘 보시면 저 한계를 넘지 않습니다. 그래서 PG-13인데도 fuck을 한두 번씩은 들을 수 있는 거예요. 유튜브를 잘 찾아 보시면 fuck을 찰지게 쓴 PG-13 영화 장면만 모아둔 컨텐츠도 찾으실 수 있습니다.

한국의 영심위 가이드라인에도 비속어에 관한 명확한 지침은 없습니다. 제가 가이드라인을 아무리 뒤지고 뒤지고 정독을 해도 비속어 사용의 선을 어디까지 잡아야 하는지는 파악이 어렵더라고요. 기회가 된다면 부산을 방문해서라도 여쭤볼 생각이에요. 자막 심의 기준이 애매하다는 건 저한테도 하나의 족쇄가 되거든요. 오히려 명확한 선을 알면 그 안에서 편히 작업하는데 그게 아니니까요.

<슬램덩크>의 이 장면 기억하세요? 드리블 중인 변덕규가 퇴장까지 1파울 남은 상태에서 채치수에게 강한 차징을 하죠. 이때도 심판이 휘슬을 안 불자 딱 그 선을 기준으로 공격해요. 스스로 안전한 선을 확인하고 그 안에서 자유롭고 과감하게 플레이하는 거죠. 저도 사실 이게 필요한데 그 선을 확인할 방법이 없어요.

 

투팍 전기 영화인 <올 아이즈 온 미> 같은 영화는 자막이 시작부터 끝까지 욕입니다. 애초에 15세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한 수입사가 시원하게 써달라고 하셨기 때문에 시작부터 끝까지 힙합스럽게 “씨발”과 “좆”이 넘쳐 흐르는 자막이었죠.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심의 결과 15세가 나왔습니다. 의아했지만 좋은 일이니 심의 기준이 많이 완화됐나 보다 하고 웃어 넘겼죠.(말 나온 김에 이 영화 좀 봐주세요. 투팍 곡이 엄청 많아서 라임까지 다 번역한다고 X똥 싸면서 작업했는데 성적이… VOD로 있습니다)

그 후에도 <로스트 인 더스트> 같은 영화도 자막이 아주 험한데 이때도 역시 15세 판정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심의가 많이 완화됐구나 싶었어요. 그렇게 나름의 기준을 쌓고 그 기준으로 다음 작품들을 번역하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분명 저 작품들보다도 수위가 낮은 자막이 대사 부문에서 청불을 맞은 겁니다. 그땐 참 머리가 복잡했어요. 그 뒤론 15세가 목표인 영화들은 작업하면서 자체적으로 자막 수위를 많이 낮추게 됐죠.

“한국 심의가 뒤죽박죽이다”라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에요. 심의가 예전에 비해 많이 완화된 것도 사실이고 영심위와 수입사들의 간담회에서 나온 말들을 들어보면 최대한 수입사들의 편의를 봐주시려고 노력하신다고 합니다. 제가 하려는 얘기는 심의라는 게 번역가가 무심결에 쓴 자막으로 결과가 뒤집힐 수도 있는 불확실한 영역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유연한 작업이 쉽지는 않죠.

정리하자면 미국은 PG-13에서도 한두 번의 욕설은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등급에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한국에서 똑같이 했다간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Freddie Fucking Mercury의 fucking을 쓸 수가 없었어요.

제 데드풀 1편 자막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웨이드 씨발 윌슨”이라는 자막을 아실 겁니다. “Wade fucking Wilson”을 그대로 옮겼죠. 이렇게 영화가 명백히 청불일 때는 쓰기가 쉽습니다.

 

프레디 씨발 머큐리
프레디 빌어먹을 머큐리
프레디 쩌는(?) 머큐리
프레디 끝내주는 머큐리
프레디 죽이는 머큐리

 

저한테 이런 자막이 낫지 않겠느냐 하고 온 피드백들인데요. 저는 쓸 수 있다고 해도 그 장면에선 망설일 것 같아요. 그 절절한 장면에서 감정선을 잘라버리는 짓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fucking이라는 수식이 들어간다고 해서 그게 무조건 험한 상욕은 아니에요. 한국어로 늘 비속어처럼 옮기려고 하면 무리한 시도가 되는 예도 많죠.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은… 감동 와장창인데요.

이건 여담이지만 노래 자막이 어떤 것은 있고 어떤 것은 없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 분들도 많으셔서 말씀드려요. 자막을 넣어도 되는 곡과 아닌 곡은 해외 본사에서 각국으로 가이드라인을 내려보냅니다. 라이센스 문제이기도 하고 문화적 고려이기도 하다는데 저도 정확한 이유는 몰라요. 보니까 나라마다 허용되는 곡 수가 다르더군요. 원래 한국은 이보다 훨씬 적은 곡에만 자막을 넣도록 되어 있었는데 폭스코리아에서 본사에 강력히 요청하시고 협의해주셔서 이 정도의 가사 자막을 넣은 겁니다. 원래 이것보다 훨씬 많이 빠질 뻔했어요. (라이브 에이드 가사도 몇 곡은 못 보실 뻔? -_-)

저는 영화 틈새틈새에 나온 곡들까지 다 번역하긴 했습니다만 그걸 제 마음대로 실을 수 있는 건 아니라서 그냥 제 보석함에서 잠자고 있습니다. 종영하면 기회를 봐서 한두 곡씩 올려볼게요.

 

 글을 올린 후로도 보랩은 쭉쭉 승승장구할 것으로 보여요. 진짜 어디까지 가려는 건지 무서울 정도네요. 똑같은 질문이 하도 많이 들어와서 전부터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너무 한창 상영 중이라 글을 못 올리고 있었어요. 궁금하셨던 분들에게 도움이 됐기를. 관람해주신 많은 관객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