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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프 오브 워터 – 자막 내 장애인 표현에 관해

셰이프 오브 워터 – 자막 내 장애인 표현에 관해

청각/언어 장애인 호칭

 

 해 2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 종영할 때쯤 자신을 청각장애인으로 소개하는 분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인 엘라이자가 자신을 ‘농아’라고 칭하는 자막 때문이었습니다. 메시지는 청각/언어 장애인들은 스스로를 ‘농아’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농아’의 정의는 아래와 같습니다.

 

농아02(聾啞)
「명사」
「1」청각 장애인과 언어 장애인을 아울러 이르는 말.
「2」귀가 안 들려 언어 장애인이 된 것.

 

이 정의에 따르면 엘라이자는 언어 장애인이기 때문에 청각/언어 장애인을 아울러 부르는 ‘농아’라는 단어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 기왕 지적이 들어온 김에 장애인 호칭에 대해 당사자에게 제대로 배워야겠다 싶어서 양해를 구하고 그분과 꽤 긴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후로도 꽤 긴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민감한 내용은 삭제했습니다.

 

그분의 지적을 짧게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농아는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낮잡아보거나 장애를 장애로만 보는 비관적인 의미가 담긴 뜻이다. 청각/언어장애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호칭은 ‘농아인’이다. ‘인(人)’의 유무가 커다란 차이를 낸다.

 

쉽게 말해 ‘농아’란 표현은 사람을 사람(人)으로 보지 않고 장애로만 그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것이죠. 그분의 말에 의하면 한국 영화 <신과 함께>에서도 청각장애인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농아’라고만 써서 청각장애인들 사이에 큰 반발이 있었고 현재 한국수화언어법에서도 ‘인’을 반드시 붙이고 사법 용어에도 ‘농아자’라고 칭한다고 합니다.

자막을 쓰면서 가장 주의하는 것 중 하나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비하하거나 젠더 감수성이 떨어지는 표현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자막만이 아니라 컨텐츠를 다루는 모든 사람들이 앞으로 더욱 주의해야 할 부분이죠. 이 자막을 쓸 때 벙어리, 귀머거리라고 쓰지 않고 ‘농아’라고 썼던 이유도 그래서였습니다. 제가 찾아본 각종 공식 문헌이나 뉴스엔 ‘농아’라는 표현이 그대로 나오고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비하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설명이 없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썼던 거죠.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멸칭에는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는 설명이 반드시 붙어야 하는데 ‘농아’에는 그런 설명조차 없었습니다.

즉, 이 단어의 사전적 정의가 사회적 인식을 못 따라가고 있다는 말이죠. 잘 아시겠지만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계속 갱신되기 때문에 표준국어대사전의 권위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농아가 잘못된 표현임을 지적하고 수정하라는 권고를 내기도 했습니다만 아직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도 수정되지 않았고 몇몇 기사에서는 ‘농아’라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더군요.

정리하자면

들을 수 있지만 말을 못 하는 사람
– 청인, 언어장애인

말은 하지만 듣지 못 하는 사람
– 농인, 청각장애인

언어/청각 장애인을 아울러 칭하는 말은 ‘농아인’입니다.

자막을 쓰다 보면 영화사에서 어렵거나 낯선 표현을 꺼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대한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는 것까지도 프로 번역가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클라이언트 측이 끝까지 반대하면 방법이 없죠. 물론 번역가가 그렇게 끝까지 고집을 피워가며 설득하는데 쉽게 무시하는 영화사는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청인, 농인, 농아인 등의 표현이 낯선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자막으로 쓰려고 해도 생각처럼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그렇게 쓰는 것이 옳다면 같이 노력해야겠죠.

 

블루레이 자막 수정

 

만간 출시될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블루레이에서는 ‘농아’ 부분이 ‘언어장애인’으로 수정됐습니다. 아주 운이 좋은 케이스였는데 이땐 ‘농아’가 잘못된 표현이란 건 모르고 있었고 전혀 별개의 건으로 수정을 요청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가 개봉하고 영화 초반 자일스의 독백에 나온 “in the last days of a fair prince’s reign.”라는 표현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로 나온다는 글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은 제가 최종 번역본을 보내기 이전 버전(4차 번역본)의 표현이었기 때문이죠. 최종으로 자막 세 개 정도를 더 수정해서 런던으로 발송했는데 그 버전이 반영 안 된 것이었습니다. 해외 업체 누구의 실수인지도 알지만 따져서 뭐하겠습니까. 영문 이메일 길게 쓸 일 만들어 봐야 나만 고생이…

“호랑이~”는 제가 1차 번역본에 썼었고 원래는 최종 번역본에서 수정한 자막입니다. 그게 그대로 나왔다길래 식은땀이 한바가지는 쏟아졌습니다. 최악의 경우 4차 번역본의 자막이 올라간 게 아니라 1차 번역본이 올라갔을 수도 있으니까요. 확인 결과 1차 번역본은 아니고 4차 번역본의 자막이었습니다. 최종본과 다른 자막은 3개. 의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막 표현을 조금 다듬은 수준의 수정이라 큰 문제는 아니었죠. 제 최종 번역본의 자막은 아래와 같습니다.

“in the last days of a fair prince’s reign.”
잘생긴 왕자님이 다스리던 시절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 아니라 “잘생긴 왕자님이 다스리던 시절”로 바꾼 이유는 갈수록 이 영화가 동화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엘라이자를 공주라고 부르는 대사들도 있죠. “fair prince” – 겉모습을 비롯한 그 어떤 조건도 사랑에 방해물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잘생긴’이라는 표현도 빼지 않고 언급할 필요가 있었고요. 왕자와 공주가 나오는 동화. 그래서 감독이 저런 대사를 썼을 거라는 판단에 최종본에서 수정했던 겁니다. – 개봉판에 반영은 안 됐지만… –

결국 저 자막은 블루레이판에서 제 의도대로 수정했고 그 김에 ‘농아’를 ‘언어장애인’으로 같이 수정했습니다. 그 타이밍에 관객의 피드백을 받은 게 정말 다행이었고 감사한 일이었죠.

병신, 벙어리, 귀머거리, 절름발이 등등 장애인을 비하하는 표현은 정말 많습니다. 그것들을 자막 내에서 무조건 정치적으로 옳은 표현으로 옮길 순 없어요. 상황에 따라 아무리 심한 멸칭이라도 사용해야 할 때가 있고, 바른 표현으로 써야 할 때도 있죠. 영화 번역에서 가장 먼저 고려할 것은 캐릭터와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굳이 필요하지 않은 용처에는 사용을 자제하는 게 좋겠죠.

 

 

족. 요근래 정말 불쾌한 메일과 메시지들을 많이 받았습니다. 피드백 주소를 열어 놓으면 정말 별의별 내용이 다 옵니다. “안티팬입니다. 공짜로 감수해 드릴 테니 주세요” 같은 내용도 와요. 그나마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셨으니 이 정도는 괜찮지만 여기 쓰기도 민망한 메시지와 메일도 많습니다. 트위터를 해킹당하질 않나, 험한 메시지들은 읽다 보면 공황장애가 올 수준이고 실제로도 증상을 조금 겪고 있습니다. 그래도 창구를 열어두는 건 위와 같은 메시지를 보내주시는 관객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듣기 싫은 소리든 아니든 내 자막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이니까.

아쉽다는 피드백들을 보면 매번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입니다. 오역과 오타는 태생적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설정을 놓치거나 게을러서 틀린 부분들은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좋은 피드백과 지적을 보내주시는 관객 분들께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표현이 험한 분들도 좋은 의도로 피드백을 보내주시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조금은 톤을 낮춰 주시면 제가 아주 감사히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끝으로 위에 긴 피드백을 주셨던 소중한 관객께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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