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번역가가 쓰는 영화번역가 이야기

영화번역가가 쓰는 영화번역가 이야기

한국에서 영화를 가장 많이 번역한 사람은 누구일까?
누구는 번역계가 여초라고 하고, 누구는 남초라고 하는데 실제는 어떨까?
영화 번역가의 정년은 얼마나 될까?

이런 질문들을 하는 관객들이 생각보다 많은데 영화 번역가 개인에 대한 기사는 많아도 이런 세부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기사는 찾기가 힘들어요. 이 시장을 나름 열심히 분석했거나 실제로 겪은 사람이 아니면 쉽게 쓰기 힘든 내용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인터넷에는 영화 번역가에 관한 온갖 추측성 썰과 출처 없는 ‘지인 카더라’가 난무하죠. 아니면 아주 오래전 이야기를 아직까지 사실인 양 한다거나. 어느 분야든 제대로 사실을 말해주는 글이 없으면 오해와 편견이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서두에 던진 질문들은 제게도 아주 중요한 질문들이에요. 저는 번역 경력이 총 12년쯤 되는데 그 중 개봉관 번역 경력은 5년 정도라 개봉관 번역가로서는 비교적 신인이거든요. “어떻게 해야 안정적인 수입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나는 몇 살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분야를 막론하고 프리랜서라면 이런 실질적인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이 길을 앞서 걷는 분들의 족적을 보는 건 제게도 큰 참고가 돼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평소 알고 있던 것들을 한번 정리해서 써봤어요. 팩트를 바탕으로 한 현직의 글이니까 카더라보단 이 내용을 믿으시는 게 좋아요.

 

영상 번역계는 여초인가? 남초인가?

론부터 말하자면 여초예요. 보통 여초가 아니라 남녀 비율 1:9 정도로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입문자들을 보면 남성 비율이 이것보단 커요. 남녀 3:7 정도 될까요. 그런데 제 경험상 남자는 결혼적령기를 기점으로 번역을 포기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찾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같은 이유로 번역을 포기하는 여성들도 많지만 남성만큼 많은 수가 빠지진 않아요. 그래서 결국 1:9라는 살벌한 비율이 나오죠.(참고로 출판번역계나 전문번역계는 상황이 많이 달라요. 출판번역계는 남자 번역가도 굉장히 많고, 전문번역계는 오히려 남초예요.)

제가 케이블 번역을 주업으로 할 때도 저 비율이었는데 요즘은 조금 달라졌을까 하고 한 번역회사에 문의를 해봤어요. 넷플릭스와 아마존 등 OTT 서비스 컨텐츠를 번역하는 회사고 현재 한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영상 번역가들은 거의 전부 거기 소속으로 작업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회사예요. 현재 그 회사의 번역가 성비가 남녀 1:9입니다. 말이 1:9지 번역가 100여 명 중 남자 2~3명 꼴이에요. 그 몇 명 안 되는 남자 번역가들도 다큐멘터리를 번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드라마나 영화를 번역하는 남자 번역가는 찾기 어려워요. 전에도 언급했었는데 저도 경력 초기엔 1년 반 정도 오로지 네셔널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만 전담해서 번역했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맡겨주지 않아서 다큐만 거의 300편을 번역했어요.

이런 뚜렷한 여초 현상은 번역가만이 아니라 업계 직원들도 마찬가지예요. 참고로 저 회사 직원(번역 감수, 교열 등) 열댓 명 중 남자 직원은 한 명입니다. 과장, 부장급 실무자는 물론이고 대표도 여자인 경우가 많아요. 이건 번역회사만이 아니라 영화 수입, 배급, 홍보사도 마찬가지예요. 직원분들의 대부분이 여성이죠. 외화 더빙 연출을 하는 PD도 여성 경력자의 수가 많습니다. 개봉관, 케이블 번역가를 모두 포함해서 지금껏 제 12년 경력 동안 직접 본 유부남 남자 영상 번역가의 수는 저를 포함해 다섯 명이 되지 않습니다. 미혼까지 포함한다고 해도 남자는 10명이 되지 않아요.

넷플릭스나 케이블, 공중파 외화 자막에서 남녀 존하대 설정 이슈가 언급될 때 번역가나 감수자가 남자라서 그럴 것이다라고 추측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오히려 여성 번역가와 여성 감수자가 작업했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남성 번역가는 “발정난 아프리카 오리 너구리가 암컷을 찾아 호수를 건너고 있습니다.” 같은 번역들을 하고 있을 확률이 크고요. 캐릭터간 존하대 이슈는 번역가의 성별보다는 업계 전반에 걸쳐 반성 없이 만연했던 젠더 감수성 무감증이 더 큰 원인입니다.

 

개봉관 번역계는 여초인가?

봉관 번역가들의 성비는 케이블계와 조금 다른 양상이에요. 한 달에 꾸준히 3편 이상 작업하는 번역가를 활발히 활동하는 번역가라고 했을 때, 활발히 활동하는 영화 번역가의 성비는 5:5 정도 됩니다. 한 달에 1편, 혹은 두어 달에 1편을 작업하는 번역가들까지 포함한다면 여성 번역가의 비율이 훨씬 많이 올라가고요. UPI의 작품을 모두 담당하는 김은주 번역가님, 파라마운트 작품을 대부분 담당하는 치킨런, 소니픽쳐스 작품을 작업하는 PIC, 그리고 홍주희 번역가님, GG이진영 번역가님, 윤혜진 번역가님,  김윤종 번역가님 등 여성 번역가분들 많습니다.

활발히 활동하는 번역가의 수가 100~200명인 케이블 번역계와 달리 개봉관 번역계는 활발히 활동하는 번역가의 수가 5~6명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좁은 풀에서 도출하는 성비 통계는 유의미하지 않다고 봐요. 대체적인 경향을 보기에는 풀이 너무 좁죠. 실제로 지금껏 개봉관 번역계의 성비는 여초일 때도 있었고 남초일 때도 있었어요. 오히려 남초이던 시절이 더 적었죠. 앞으로는 여초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 이유는 뒤에 말씀드릴게요.

 

지금껏 한국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번역한 번역가는?

단 정답부터. UPI(유니버설픽쳐스 인터내셔널코리아) 작품을 전담하고 계시는 김은주 번역가님입니다. 91년부터 활동하셨고 2007년 인터뷰를 보면 그때 이미 300편 이상 번역하셨을 때니까 지금은 편 수를 세기도 힘드실 것 같아요. 영어권 작품은 이미도, 김은주, 조상구 번역가님을 필두로 10명 정도가 있었고, 일본 영화는 강민하 번역가님을 포함해 2~3명 정도가 있었습니다. 그외 당시 활동하셨던 분들은 대부분 업계를 떠나시거나 활동 폭이 크게 줄었지만 김은주 번역가님은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세요.

이미도 번역가님은 1년에 두 편 정도 작업하시고 번역보다는 집필과 강연에 집중하고 계십니다. 조상구 번역가님은 번역 절필을 선언하셨고요. 이명자 번역가님, 모모씨님도 활동 폭이 많이 줄은 반면에 김은주 번역가님은 지금도 꾸준히 내노라 하는 블록버스터들을 작업하고 계십니다.

<미이라> ,<겟 아웃>, <분노의 질주: 더 익스트림>,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 <제이슨 본>, <매그니피센트7> 같은 블록버스터부터 <컨텍트>, <서프러제트>, <대니쉬 걸> 같은 예술성 있는 작품까지 다양하게 활동하고 계시고 60년생이신데 감각이 젊은이들보다 좋으시죠. 그래서 여러모로 제가 닮고 싶은 번역가이자 지표로 삼고 있는 분이기도 해요.

 

왜 여성 번역가들은 언급되지 않나?

년 전만 해도 영화 번역가 기사엔 여성 번역가들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김은주, 홍주희, 이진영 번역가님을 필두로 한 여성 번역가분들의 선전이 돋보였거든요. 지금은 그에 비해 남성 번역가들의 선전이 두드러지는 시기다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왜 남자만 블록버스터를 맡느냐고 물어본 분들도 계셨는데 꼭 그렇진 않아요. 블록버스터, 혹은 대형 프렌차이즈 무비라는 게 꼭 히어로 무비만 있는 건 아니거든요. 데드풀 같은 경우는 제작비 5,800만 달러로 오히려 저예산 영화이기도 했고요.(보통 블록버스터의 제작비는 못해도 1억 달러 이상입니다)

<스타트렉>, <미션임파서블>, <분노의 질주>, <쥬라기 월드>, <제이슨 본>, <트랜스포머>, <해리포터>, <캐리비안의 해적> 등

이런 초대형 블록버스터 시리즈들은 여성 번역가들의 작품이에요. 어지간한 마블 무비와 견주어도 제작비가 떨어지지 않는 작품들이죠. 지금 이런 작품들은 김은주 번역가님과 치킨런이 주로 작업하시는데 UPI는 정책상 번역가 크레딧을 올리지 않고 치킨런도 회사명이기 때문에 번역가가 크게 언급되는 면이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MCU 무비가 대세가 아니던 시절엔 엑스맨 무비와 DC가 더 유명했죠. 당시 엑스맨 무비와 배트맨 같은 작품들을 여성 번역가가 작업하기도 했어요. MCU나 DC 같은 히어로 무비들이 언제까지 대세일지 모르겠지만 오래 이어진다면 다시 여성 번역가가 작업할 수도 있고 그 후엔 또 남성 번역가가 작업할 수도 있고 어떻게 될지는 장담 못 하죠.

 

앞으로의 전망

인적인 짐작이지만 앞으로 개봉관 작품을 작업하는 영화 번역가는 여성의 수가 훨씬 많아지지 않을까 해요. 제 뒤로, 혹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영화 번역가들이 몇 명 있는데 거의 대부분이 여자분이더군요. 이런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 될 거예요. 예전엔 영화 번역가를 지망하는 사람들도, 번역가를 구하는 영화사도 서로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알음알음 소개로 데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죠. 케이블, OTT에서 활동하는 베테랑 번역가들은 영화사에 보여줄 필모그래피가 전보다 훨씬 풍부해졌어요. 넷플릭스 무비나 HBO 시리즈 같은 경우는 어지간한 영화보다 훨씬 인지도가 높아서 필모로 쓰기 좋죠. 상대방이 알아봐야 필모로 가치가 있으니까요. 무턱대고 번역하고 싶다며 연락해오는 사람들을 못 믿어서 번역을 맡기지 못했던 영화사 입장에선 아주 좋은 후보군이 생긴 겁니다. 물론 데뷔도 힘들고 지속적인 활동은 더욱 힘들겠지만 지금은 예전처럼 영화 번역가 데뷔가 아예 통곡의 벽 같은 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1:9 비율로 여성이 압도적인 풀이기 때문에 거기서 올라오는 분들도 여성의 비율이 많다고 봐야겠죠. 제 뒤로 데뷔한 분들을 보면 어디서 활동하셨는지 아예 처음 듣는 분들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은 케이블, OTT, 영화제 등에서 오래 활동하고 경력을 쌓은 분들이에요.

 

영화 번역가의 정년은?

르겠습니다. 모르겠어요. 저도 좀 알고 싶은데 짐작이 안 돼요. 60년생이신 김은주 번역가님이 현역에선 가장 고참이시니까 그분을 지표로 생각할 순 있겠지만 저도 그때까지 왕성히 활동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순 없거든요. 엄청난 자기 관리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에요. 저는 오래 해야 50대 초반까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해요. 기회가 된다면 물리적으로 못 하는 시기가 올 때까지 열심히 일하고 싶은데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관객과 영화사, 가장 중요하게는 작품에 폐가 되지 않으려면 젊은 감각을 유지하고, 영화를 꾸준히 공부해야 하고, 살벌한 마감을 맞추려면 체력도 유지해야 해요. 물론 그 모든 걸 완벽히 한다고 해도 영화사와 관계가 틀어지거나 외적인 요인으로 당장 내일부터 백수가 될 수도 있고요. 그러니 영화 번역가로 오래 남으려면 지금까지의 운보다 훨씬 많은 운이 필요하겠죠.(데드풀이 30편까지 나온다거나 하는)

영화 번역가로 이슈가 되고 호평을 받는 건 한순간이고 오랜 경력에 걸쳐 실수들이 쌓여 비난을 받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순서예요. 저도 한 2~3년 후면 엄청나게 욕을 많이 먹는 번역가가 돼 있을 거예요. 그때가 되면 지금처럼 관객들과 즐겁게 영화 얘길 하고 시덥지 않은 농담을 하는 편한 사이로 남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요. 그래서 고민이 될 때도 있어요. 그냥 내 이름을 크레딧에서 다 빼고 활동하는 게 번역가로서의 수명을 늘리는 방법이 아닐까 하고.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 중 하나인데 또 그렇게 하자니 삶이 너무 무료해질 것 같아요. 영화 번역, 관객과의 소통이라는 행위가 지금 저한테는 단순한 업이 아니라 일상 그 자체거든요. 쉴 때도 영화 자료를 찾고 관객 반응을 보고, 핸드폰을 켜면 댓글로 관객들과 영화 얘길 하면서 떠들고, 관객이 메일로 보낸 자막 피드백도 보고.

“초심을 유지하신다면 오래오래 응원하겠습니다”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셨는데 초심을 유지하는 건 그렇다쳐도 초심만 가지고 실수를 안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자신이 조금 없습니다(?). 아무튼 번역가로서의 수명을 어떻게 하면 늘릴 수 있을지 고민이 커요.

평생 결론이 안 나서 고민을 포기할 때쯤 한 80살 되고 노환으로 번역가 은퇴하면 참 좋겠어요.(데드풀 32편 은퇴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