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막이 왜케 짧아요? (스파이더맨 홈커밍)

자막이 왜케 짧아요? (스파이더맨 홈커밍)

<스파이더맨 홈커밍>에 대한 질문이 들어왔어요. 스샷을 떠서 질문해 주셨더라고요.

“이미지 2처럼 아주 귀여운 내용인데 왜 다 삭제하고 1처럼 줄였나요?”

이미지 1은 질문 주신 분이 보내신 이미지고, 이미지 2는 방금 제가 만든 거예요. 설명에 앞서 영상 번역엔 크게 두 가지 제약이 있다는 점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하나, 언어적인 제약
둘, 물리적인 제약

 

장난, 어순, 문화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게 언어적인 제약이고, 자막 길이나 자막이 떠있다가 사라지는 시간(duration이라고 해요), 오디오 맞물림 등이 물리적인 제약이죠. 위 자막은 물리적인 제약에 포함돼요. duration이 1.3초 정도로 잡혀 있는 자막이라 관객이 1.3초 안에 자막을 읽을 수 있게 써야 해요. 1.3초면 자막 duration 중에서도 짧은 축에 속하기 때문에 이미지 2처럼 쓰기가 불가능해요. 이미지 2정도의 길이로 쓰려면 duration 3~4초쯤 돼야 하거든요. 게다가 저 화면이라 그렇지 스크린 크기가 어마어마한 극장에서는 저런 길이면 자막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가며 읽어야 할 거예요.

관객들이 자막을 못 읽을 길이임에도 꼭 넣어야겠으면 duration을 무시하고 우겨서 넣는 방법도 있긴 한데 그건 워드로 작업할 때 가능한 방식이에요. 그냥 쭉 쓰고 자막을 올리는 업체에 이 자막은 죽어도 넣어야 하니 무조건 넣어 달라고 요청하면 되죠. 그런데 <스파이더맨 홈커밍> 같은 경우는 그것도 불가능해요.

제가 작업하는 영화들 중 폭스, 소니 같은 직배사 작품들은 해외업체의 보안 소프트웨어를 사용해서 번역해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한방에’, ‘subtitle edit’ 같은 프로그램과 비슷해요. 그 소프트웨어에는 자막마다 초과하면 안 되는 duration과 글자 수가 정해져 있어요. 이미지 2처럼 번역할 경우 red flag라는 게 뜨죠. ‘경고’라고 보시면 되는데 “이 자막은 너무 길어서 정해진 duration 내에 읽을 수 없음”이라는 뜻이에요. 그 경고를 무시하고 넘기면 해외에서 리뷰하시는 분이 또 다시 제게 메일을 보냅니다. “red flag 떴는데 수정이 안 됐더라, 수정해 줘라”.  소프트웨어 상에서 용납하지 않는 길이라는 거죠.

 

화 번역가는 자막의 수만큼 선택의 갈림길을 만나요. “어떤 정보를 희생하고, 어떤 정보를 살릴 것이냐”. 다 살리면 제일 좋겠지만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제약으로 못 살리는 경우가 허다하거든요. 저건 번역가의 능력을 떠나 실제적인 한계예요. 다만 duration이 충분하거나 말장난을 살릴 여지가 충분한데 아무런 고민도 없이 그냥 쉽게 처리해 버리는 건 번역가로서 직무유기죠.

세상에는 오역보다 훨씬 나쁜 것이 있다. 그것은 읽기 힘든 나쁜 문장으로 나열된 번역과 맛이 결여된 지루한 번역이다.

번역가로도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에 나오는 글이에요. 오역이나 실제적인 제약은 그 한계를 인정해야 하지만 무성의한 번역은 지탄받아도 할 말이 없죠. 제가 가장 경계하는 것도 그거예요. 일반 관객들은 모를 수 있어도 번역가들은 책이든 자막이든 번역문을 보면 이 사람이 고민을 했는지 안 했는지 정도는 쉽게 알거든요. 번역가들이 알아챈다는 건 곧 관객들도 알아챌 때가 온다는 말도 돼요. 요즘 관객들의 자막을 평가하고 분석하는 눈은 예전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날카롭고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번역가에게 접근하고 있으니까요. 저도 제약이나 오역으로 온전한 뜻을 전달하지 못하는 일은 있을지언정 성의가 없어서 전해야 할 정보나 대사의 뉘앙스를 버리는 일은 없도록 노력하려고 해요.

 

무 재밌고, 의미가 깊은데 제약 때문에 자막으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위에 질문 주신 장면도 너무 귀여운데 아깝죠. 그래서 번역 후기에 이런저런 것들을 적는 거기도 해요. SNS에서 말씀을 드릴 때도 있고요. 자막에서 표현 못 했지만 혼자만 알고 있기 아까운 것들을 쓰느라. 일이 바빠서 번역 후기를 잘 못 썼는데 새해에는 가능하면 자주 쓰도록 할게요. 워낙 꿈처럼 간절하던 일을 하고 있는 요즘이라 사실 태만할 여유도 없어요.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죠. 12월이니까 곧 결산 겸해서 하나 더 써볼게요. 질문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