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러너2049 - 번역 후기(스포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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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러너2049 – 번역 후기(스포일러)

블레이드러너2049 – 번역 후기(스포일러)

이렇게 원작이 유명한 작품의 후속편을 번역하는 일은 독이 든 성배와도 같습니다. <블레이드러너>처럼 열성적인 팬이 많은 작품들은 더 그렇죠. 이럴 땐 정말 잘 번역해서 좋은 평을 받아야겠다는 생각보다 정신 차리고 작업해서 영화에 폐 끼치지 말자는 생각이 더 많이 들어요. 이런 작품은 대사 하나하나를 해부하듯 감상하는 관객들이 많기 때문에 과감한 의역을 지양하고 대사 그대로를 옮기려고 노력하게 되죠. 그래서 이 작품엔 다른 작품보다 문어처럼 문장이 딱딱한 자막들이 많이 등장해요.

막상 완성된 자막을 보는 입장에선 잘 느껴지지 않지만 ‘The black-out’ 같은 간단한 말을 옮길 때조차 ‘대정전’이란 말을 떠올리기까지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리고 많은 고민을 합니다. 저처럼 글재주가 뛰어나지 않은 사람은 그 시간이 더 길죠. 이런 고민과 번역 경험들을 관객분들과 나누는 건 참 재밌는 일이에요. 그래서 GV에서 관객분들과 대화하는 게 재밌는 것 같아요. GV가 없을 땐 번역 후기로 얘기하는 것도 재밌고요.

아래 내용들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읽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영화를 보고 읽으시면 더 재밌으실 거예요.


 

1. 음역

<블레이드러너2049>는 원작의 충실한 계승작으로 고유명사 또한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어요. ‘리플리컨트’, ‘오프월드’ 같은 용어들인데요. 여기서 첫 번째 고민은 “원작과 동일하게 옮길 것인가?”, “시대에 맞게 고칠 것인가”예요. 저는 음역이 낫다고 판단했어요.  원작 자막에 ‘복제인간’, ‘식민지’라고 번역돼 있음에도 <레이드러너>를 아는 관객들은 ‘리플리컨트, 오프월드’등의 용어에 아주 익숙하니까요. 그리고 <블레이드러너>가 번역된 93년도에는 자막에 음역이 거의 없었어요. 오히려 고유명사를 모두 한국화하는 게 일반적이었죠. 아주 극단적인 예지만 이런 것도 있어요.

You know, like Starsky and Hutch.
Like lke and Tina.

영화 ‘투캅스’의 안성기와
박중훈처럼 멋지게 해낼 거요!

– <솔드아웃(1996)> 중에서

지금 보면 촌스럽겠지만 저 시절엔 저 자막이 아주 세련되고 관객들을 위해서도 좋은 자막이었어요. 하지만 지금 관객들은 저런 방식보다는 대화의 정확한 정보를 중시하죠.

 

2. 성경

기본적으로 대사에 레퍼런스가 아주 많아요. 가장 많은 출처는 성경인데요. 성경 레퍼런스는 신을 자처하는 인물답게 월레스의 대사에 많이 나오죠. 러브가 월레스에게 보고하러 가는 첫 장면에서 월레스가 천사는 천국에 빈손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대사를 해요. 이때 “한 아이가 태어났다는 말 정도는 하겠지?”라는 대사가 있는데 ‘그 아이’가 아니라 ‘한 아이’라고 써서 그런지 문장이 아주 어색해요. 이 부분은 영어 대사로도 ‘the child’가 아니라 ‘a child’라고 나옵니다. 상식적으로 둘 다 어떤 아이를 말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정관사를 써서 ‘the child’라고 칭하는 게 맞는데 어딘가 이상하죠. 이사야서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말하는 “For unto us a child is born, unto us a son is given” 구절에서 온 표현이기 때문이에요. 사소한 부분이지만 아기 예수와 엮어 생각한다면 또 생각할 여지가 많아지는 대사예요.

나중에 월레스가 성경의 ‘라헬’을 언급하는 대사도 있는데 라헬은 영어 발음으로 ‘레이첼’이에요. 이걸 레이첼로 써야 할지 말지도 고민이 많았는데 결국은 라헬로 썼습니다. 저는 다른 건 몰라도 경전 구절은 문장이 너무 길어서 아예 물리적으로 자막이 들어가질 못 하는 경우가 아니면 모를까 임의로 변형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어요. ‘레이첼’로 쓰는 게 관객의 이해에는 좋을 텐데 그렇다고 라헬을 레이첼로 쓰자니 “예수 가라사대”를 “지저스 가라사대”로 쓰는 것처럼 어설프게 보이더라고요. 관객들이 알아봐 줄 거라는 판단으로 인명은 그대로 밀어붙였어요. 그 외에도 탕자, 갈라디안(증후군) 같은 말들도 전부 성경에서 나온 것들이죠.

 

3. 피노키오

K와 조이의 대화 중에 real boy, real girl이라는 말이 나와요. “real boy에겐 이름이 필요하다”, “(내가 사라진다는 것을)알아, real girl처럼” 이런 대사인데요. 이건 워낙 유명해서 아셨을 거예요. 진짜 소년이 되고 싶었던 피노키오 이야기죠. 피노키오 원작에 지겹도록 많이 나오는 말이에요. 자막에 ‘소년, 소녀’ 같은 말을 쓰면 구어 같지 않아서 어색한데 그대로 살려놓은 건 피노키오 레퍼런스라는 걸 알아주십사 하는 생각에서였어요. 복제인간인 K와 AI인 조이가 나누는 대화에 피노키오 레퍼런스라니 잔인한 것 같기도 하고, 가엽기도 하고.

 

4. 실낙원

월레스가 여성 리플리컨트의 배를 가르면서 하는 대사는 실낙원의 인용 구절이에요. “황량한 땅”, “소금기 가득한 대지”, “seat” 같은 표현들을 가져다 썼더라고요

 

5. 기준선 테스트

K가 테스트에서 암송하는 문장은 <롤리타>의 저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의 한 구절입니다. 원래는 자막보다 조금 더 깁니다만 자막에 우겨넣으려고 해도 다 들어가질 않았어요. 이건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원문을 찾아서 올려드릴게요.

 

6. 퇴역(retire)

이게 가장 고민을 많이 했던 용어 같아요. 원작 자막에선 ‘제거’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며칠 전 방영된 EBS판 자막에선 ‘폐기’로 번역된 것으로 알아요. 의미만 따지자면 ‘폐기’가 가장 가까울 거예요. 그런데 그냥 폐기라고 쓰기엔 마음에 걸리는 게 너무 많아요.

우선 첫 번째, 폐기나 제거의 의미만을 쓰려고 했다면 작가가 eliminate, terminate처럼 더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굳이 retire라는 표현을 고르지 않았을 거예요.

두 번째, retire를 폐기나 은퇴, 제거로 쓰면 <블레이드러너> 개봉 후 30년간 이어진 “데커드는 리플리컨트인가, 인간인가?” 논쟁을 대사에서 살릴 수가 없어요. 빌뇌브 감독은 후속작에서도 그 논쟁의 종지부를 찍지 않고 최대한 애매모호하게 여지를 주는데요. 그 모호함은 K와 가프의 대화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가프 : “오래 살 친구는 아니었어”

K: “어떻게 알죠?”

가프 : “눈을 보고 알았지(Something in his eyes.)”

K: “연락할 방법은 아세요?”

가프 : “그 친구 퇴역했어(Retired)”

위에 나온 가프의 대사 세 개 모두 관객에게 데커드가 리플리컨트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줍니다. 이 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Retire를 ‘은퇴’로 번역하면 여지를 던지는 감독의 의도는 지워집니다. 같은 맥락으로 영화 시작부터 Retire를 ‘폐기’로 번역하지 않고 내내 ‘퇴역’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이 대사의 중의성이 유효한 거죠. “Something in his eyes” 같은 대사도 번역할 때 “눈빛을 보고 알았다”처럼 대개 ‘눈’보다 ‘눈빛’이라는 표현을 자주 선택해요. 그런데 여기서는 리플리컨트와 눈의 상관관계 때문에라도 그대로 쓰는 게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은퇴(隱退)
직임에서 물러나거나 사회 활동에서 손을 떼고 한가히 지냄

K의 대사 중에 “아기를 retire 해본 적이 없다“라는 게 있어요. 여기서 “아기를 은퇴시켜 본 적은 없다”는 아무래도 이상하죠. 한가히 지낸다는 뜻도 작품에서 말하는 retire와는 거리가 있고요.

 

퇴역(退役)
1」어떤 일에 종사하다가 물러남. 또는 그런 사람이나 물건.
2」『군사』현역에 있다가 완전히 물러남. 또는 그런 일.

현역 임무를 마치고 용도를 다한 장비나 무기들도 퇴역한다는 말을 사용하죠. 해군 군함 얘기 중에 ‘퇴역함’ 같은 말을 들어보셨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폐기나 은퇴보다는 퇴역이 어울리는 표현이 아닐까 싶어요.

 

7. 원작 자막

레이첼의 보이트캄프 테스트를 녹음한 대사가 두세 마디 나오는데 이 자막은 원작 자막을 찾아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여담이지만 이 작품이 제 all time best top3에 들어간다고 했던 얘기가 참 예상 외로 여기저기 많이 퍼졌더라고요. 동감한다는 분들도 많이 계셨지만 비웃는 분들도 계셨어요. 심지어 SNS 사담에서라지만 이름만 대면 알만한 평론가님까지 “저런 영화를 인생 탑3에 올린 애도 있다더라, 누구냐”며 비아냥하시는 걸 봤습니다. 끽해야 로튼토마토 지수도 60%정도밖에 안 되는 <그랑블루>가 제 인생 영화 top3에 있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웃으실지. 며칠 전에 나온 평점을 보니 괜찮게 주셨던데 영화를 보기 전에 말씀하신 것 같기도 해요. 모든 관객이 <화니와 알렉산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같은 작품들을 줄줄 읊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에게 소중한 작품 목록을 결정하는 데엔 그 영화의 만듦새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적 요소들이 반영된다는 걸 잘 아실 겁니다.

저는 영화를 번역하고 나면 그때부턴 영화 커뮤니티에 글을 쓸 때도, 시사회장에서 관객분들을 만날 때도 그분들과 똑같이 관객A죠. 일개 관객A의 평에 저런 반응들을 하시는 걸 보고 참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인의 인생 영화 톱3’나 ‘역사에 남을 인생 영화 톱3’, 심지어는 ‘홍길동 씨의 인생 영화 톱3’를 대신 말한 것도 아니고 다름 아닌 ‘내 인생의 톱3’를 말하는데 그게 옳네, 틀렸네 하는 글을 보고 있으려니.

제가 요새 젊은 커뮤니티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화가 있어요. ‘취존’, ‘취좆’이라는 건데요. 말이 좀 경망스러워서 그렇지 기본적인 뜻은 아주 좋아요. 상대의 취향을 존중하는 것이 ‘취존, 그 반대의 뜻으로 상대의 취향을 폄훼하고 뭉개는 게 ‘취좆’이에요. 요즘은 오히려 연령대가 낮은 커뮤니티일수록 저런 면에서 아주 엄격해요. 남의 취향을 평가하는 사람은 사정없이 손가락질을 당하고 심지어 커뮤니티에서 쫓겨나기도 합니다. 요즘 세대는 문화에 노출되는 양이 소싯적 기성세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문화를 즐기는 방법도 각양각색이고 그 깊이도 훨씬 깊죠. 때문에 더욱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 같아요. 이런 건 기성세대들이 좀 배웠으면 합니다.

앞으로는 평을 남기는 것도 조금 조심스럽지 않을까 싶어요. 힘들게 마케팅하시는데 제 하찮은 발언이 의도하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건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거든요.

이렇게 멋진 작품을 번역할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었고, 제가 번역하기까지 수많은 운이 겹쳤는데 그 운에도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나도 미흡한 자막 늘 잘 봤다고 토닥여 주시는 관객분들께도 감사하고요. 그런 분들 때문에라도 번역 후기를 올릴 땐 왠지 관객분들에게 올리는 사후 작업 보고서 같은 기분이에요. 🙂 이미 피드백을 몇 개 받았는데 직배 작품이라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로건은 아주 드문 경우였고 사실상 어렵다고 봐야 하거든요) 반드시 반영해야 하는 피드백이면 2차 판권에선 수정할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반드시 영화관에서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에요. 혹시나 이 글을 보신 분들 중 아직 못 보신 분들이 계시다면 꼭 보시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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