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포함 번역후기 - 영화번역가 황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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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포함 <스파이더맨:홈커밍> 번역후기

스포 포함 <스파이더맨:홈커밍> 번역후기

드풀, 엑스맨 아포칼립스, 로건.  지금껏 마블 작품을 몇 개 작업해보긴 했지만 MCU 작품을 작업하긴 처음이라 걱정이 많이 됐어요. MCU 무비는 워낙 팬들이 많기도 하고 <스파이더맨: 홈커밍>에 앞으로 이어질 MCU 무비들과 닿아 있는 지점들이 알게 모르게 있을 수 있어서 그런 것들을 놓치거나 틀리게 옮길까봐 걱정했거든요. 집에 엄청 크고 두꺼운 마블 대백과 사전이 한 권 있습니다만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되더라고요. 스파이더맨 후속작은 어떤 분이 번역하게 될지 몰라요. 운이 좋다면 제가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번역가분들이 하실 수도 있고. 그래서 첫 설정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설정을 망쳐 놓으면 다음에 번역하시는 분이 괴로울 수도 있거든요.

정말 다행히도 평소에 알던 마블 블로거분이 계셨어요. ‘아로니안’이라는 필명을 쓰시는 분인데 로건 VOD 부가 영상 촬영 때 뵀던 분이에요. 그때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지식이 상당하시고 말도 워낙 잘하셔서 기억에 많이 남았는데 그때 뵌 후로는 번역 중 마블과 관련된 궁금증이 있으면 제가 카톡으로 지겹게 여쭤보고 있어요. 요즘에는 마블 무비 GV도 자주 하시더라고요. 홈커밍 GV도 하신다니 궁금하신 분들은 꼭 들으세요. 정말 신기한 이야기들 많이 들으실 거예요.

 

캐런

커밍에선 캐런과 피터가 상호하대를 합니다. AI가 사람에게 하대하는 게 설정상 옳은 것인지도 고민을 많이 해야 했는데요. 제가 보기에 캐런은 자비스에 비해 말투가 굉장히 인간적이에요. “목적지가 어디야?”가 아니라 “오늘밤엔 어디로 데려갈 거야?” 같은 말을 쓰는 것에서 알 수 있지만  AI면서도 1차적인 의미를 벗어난 말들을 구사하고, 정식 상영본에선 편집됐지만 완성본 이전엔 피터와의 대사 중에 희노애락을 표현하는 감정적인 대사들이 많았어요. 어떤 내용인지는 혹시나 법적인 문제가 있을지 몰라 말씀 안 드릴게요. 이렇게 말투만 봐도 캐런은 개발 당시부터 자비스보다 인간에 가깝게 만들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캐런이 존대, 피터가 하대
캐런과 피터 상호 존대
캐런과 피터 상호 하대

이렇게 세 가지 옵션을 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막을 다 써봤어요.  홈커밍 번역에 사용된 소프트웨어는 영상을 스트리밍으로 보면서 그 위에 자막을 얹을 수 있는 방식이라 자막이 어떤 느낌인지 다 볼 수 있었거든요.(영화사마다 소프트웨어가 달라요) 제가 판단하기에 캐런과 피터 상호 하대가 가장 잘 어울렸어요. 그리고 피터가 캐런에게 존대하는 것으로 설정하면, 만에 하나 후속작에 캐런이 등장한다고 가정할 때 골치 아파지니까요. 전투 장면에서 등장할 가능성이 큰데 그 긴박한 상황에 일일이 존댓말을 쓰기가 여러모로 불편해요. 존대로 처리하면 자막 글자 수도 늘어서 대사가 늘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그런 장면에선 자막도 간결하게 팍팍 치고 나가는 맛이 있어야 해요. 이런 존하대 설정 하나를 망쳐놓으면 후속편 번역가가 많이 힘듭니다.

Suit lady도 고민이었는데 예의바른 피터는 AI에게도 함부로 말하지 않더라고요. lady라고 하면 존칭이지만 그렇다고 피터가 말끝마다 ma’am을 붙이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캐런에게 아주 깍듯한 말투를 쓰는 것은 아니라고 봐야겠죠. 그러니 ‘슈트 여사님’ 같은 표현은 쓰기가 어색해요. ‘슈트 숙녀님?’은 더 어색하고 그렇다고 ‘슈트 아주머니’도 웃기죠. ‘슈트 아가씨’는… 너무 걸죽한 게 아재 같고 올드해요. 그래서 떠올린 게 ‘누나’였어요. 톰 홀랜드는 헐리웃에서 누나 팬이 가장 많은 배우 중 하나이기도 하고 캐런은 진짜 쿨한 누나처럼 연애 상담도 해주고 하니까요.

 

이모지

막에 이모지를 쓰자는 생각은 지금껏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 괴랄한 발상을 하는 변태 번역가가 어디 있겠어요.(있네요✌️) 이번엔 정말 우연히 생각이 스쳐서 시도해봤는데 되길래 오히려 당황했습니다. 위에 말씀드린 것처럼 소프트웨어로 번역을 하는데 거기 이모지를 복사해 붙였더니 문자처럼 붙더군요. 그런데 그 단계에선 확신할 수가 없었어요. DCP라는 상영 완성본으로 인코딩되어 나올 때 에러가 뜨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홈커밍 자막 제작을 총괄하는 해외 업체에 문의를 넣었어요. 제가 번역해서 그쪽으로 넘기는 시스템이거든요. 그쪽에 문의한 결과 상영본에도 오류 없이 올라간다고 컨펌을 주길래 소니 측에도 넣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드리고 넣어본 거예요. 이모지가 OS마다(윈도우, 맥, IOS, 안드로이드) 모양이 다 다르게 출력되고 심지어 트위터, 페이스북에도 모양이 다르게 출력돼서 실제 화면엔 어떻게 출력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극장에서 내부시사 하던 날 과연 제대로 나올지 두근반 세근반으로 봤는데 다행히 나오더군요. 제가 넣었던 이모지와는 형태가 달랐지만 그래도 주먹과 고양이로 출력됐으니 만족스러워요.

그 동안 한국 자막 사상 이런 시도 자체가 없었고 이렇게 튀는 짓은 좋은 소리를 못 듣기 때문에 많이 망설였는데 막상 넣고 보니 거의 티가 안 날 정도로 잘 붙더라고요.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해당 자막에서의 이모지 사용은 의역도 아니고 직역입니다. 이모지 직역?…이 말이 될까요?

1.
I’m ready 👊
준비됐어요👊

2.
😺king Bon Jovi…
(영상에서도 화자의 입에 고양이 이모지가 붙으면서 fuck이 묵음 처리되죠)
😺나 본 조비…

보시다시피 의역이라기보단 이모지를 사용한 직역이죠. 아마 다른 영화에선 이모지를 쓸 일이 없을 거예요. 평생 이모지를 다시 쓸 기회를 못 만날 수도 있고요. 괜히 나오지도 않는 장면에 튀어보겠다고 억지로 넣으면 자막이 망가지거든요. 이번엔 관람한 관객들이 이모지의 존재를 거의 몰라서 신기했어요. 너무 튀어서 많이들 알아보셨으면 오히려 민망했을 텐데 잘 모르셔서 좋더라고요. 이모지가 자막에서 문자 이상으로 현대인들에게 익숙해진 현상도 언어학적으로 유의미한 사건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대중 문화를 다루는 번역가로서 이런 흐름을 내 작업 중에 체감할 수 있었던 건 정말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해요.

*1번은 초반에 피터가 해피에게 문자를 보내는 장면.
*2번은 학생들이 워싱턴 기념비에서 살아돌아온 후 교내방송 인터뷰를 하는 장면.

 

급식체?

커밍의 주인공 피터는 고등학생이죠. 주요 인물이 대부분 고등학생이에요. 그래서 말투가 기존의 히어로물 보다는 어려야 했어요. 그렇다고 피터가 “수트 개이득! 거미줄 오진 부분 ㅇㅈ? ㅇㅈ?” 이런 오리지널 급식체를 쓸 순 없는 거고 멀쩡한 선에서 어린 티를 내야 한다는 게 관건이었어요. 사실 “쩐다” 같은 말도 싫어해서 자막에선 잘 안 쓰는 편인데 최소한 그런 표현들이라도 들어가야겠더라고요. “cool!”이 나올 때마다 “끝내준다, 죽인다, 멋있다”로 쓰기엔 너무 올드해요. 사실 톰 홀랜드가 영국어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미국어를 쓰다 보니 “oh my god”과 “cool”이 과하게 많거든요.

 

피터의 어린이 아우라

터가 어린이라고 할 순 없지만 톰 홀랜드라는 배우가 주는 이미지 때문일까요. 이번 버전의 스파이더맨은 지금까지의 히어로들과 이미지가 많이 달라요. 지금까지의 히어로들은 “멋있다”의 이미지가 컸고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은 “귀엽다”의 이미지가 크죠. 그래서인지 팬들도 톰 홀랜드의 스파이디에겐 “우와!!”가 아니라 “우쭈쭈~”하는 면이 있어요. 그래서 어리고 귀여운 면들을 많이 살리고 싶었는데 전부 제 뜻대로 쓰진 못 했어요. ‘트레이닝 휠’ 같은 것도 원래는 더 어린이 아우라 뿜뿜하는 표현을 썼었고요. 모든 영화가 그렇지만 자막이라는 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모여서 결정되거든요. 그래도 잘 보시면 피터의 어린이 아우라는 여러 자막에 슬쩍슬쩍 묻어 있어요. ‘수트 누나’라는 표현과 캐런이 반말을 하는 것도 이런 의도의 일부고요.

존 왓츠 감독의 인터뷰를 보니 고교 시절 모터사이클 광이었대요. 학교에 앉아 있는 내내 모터사이클만 생각하고 어떻게든 빨리 나가서 하루에 1분이라도 모터사이클을 더 타고 싶어 했던 십대. <스파이더맨: 홈커밍>은 여기서 출발한 영화래요. 우연히 히어로가 된 평범한 십대가 얼마나 히어로로 활약하고 싶어 근질근질할 것인지. 피터가 학교에서 내내 시계만 보다가 스파이더맨 수트를 입고 뱉는 첫 대사는 “finally”예요. 드디어 좀 살겠다는 뜻인데요. 자막은 “숨통 트이네”로 나갔죠. 이렇게 두근두근대고 안절부절 못하는 캐릭터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작업했어요.

 

말장난과 유머

외로 대사를 이용한 유머가 적어요. 데드풀 수준은 아니더라도 말장난이나 대사 유머가 굉장히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들은 그리 많지 않고 상황이나 동작이 유머러스한 장면이 많죠. 그래서 오히려 자막이 담백한 편이에요. 대사가 담백한데 코믹한 느낌을 준다고 오버하다간 대참사가 벌어진다는 걸 잘 알거든요. 완성본 이전 버전에서는 농담도 꽤 있었는데 최종본을 보니 그런 농담들은 많이 편집됐더라고요. 번역해 넣으면서도 이건 유머가 좀 시시하고 애매한데… 싶은 장면들이 여럿 있었어요. 편집신께서 도우셔서 그런 장면들이 다 잘려나갔습니다. 다시 한번 감독님 감사합니다.

솔직히 시인하자면 그것들도 정말 열심히 번역했습니다만 그 장면들은 번역된 자막들도 재미없었어요. -_- .. 뭐였는지 말씀드리고 싶지만 이것도 법적인 문제가 있을까 싶어. 혹시 나중에 관련 내용으로 감독 인터뷰라도 뜨면 말씀드릴게요.

 

아로니안님의 서포트

로니안님께는 주로 설정이나 용어, 이름 같은 것들을 주로 여쭤봤어요. 내용을 발설하면 큰일나기 때문에 내용상 궁금한 점까지 여쭤보진 못하고 설정과 용어 위주로 여쭤봤죠. 제가 작업한다는 게 외부로 알려지기 전에는 어떤 작품인지도 말씀 안 드렸어요. 처음엔 올해 개봉하는 <토르>인 줄 아시더군요. 여쭤봤던 것들 중에도 편집된 내용이 있어서 다 말씀드릴 순 없고 작은 예를 들자면 이런 거예요. “한국의 MCU 팬들은 ‘맥 가건’이란 표기가 익숙한가? ‘맥 가간’이 익숙한가?”, “혹시 코믹스에서 토르의 벨트가 등장한 적 있는가? 있다면 정확한 명칭은 뭔가?”, 그외 헐크와 울트론에 대한 것들도 여쭤봤었어요. 여쭤보면 거의 즉답해주시는 분이라 너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이 기회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마블 작품을 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또 제 품에 떨어지는 작품이 있다면 그때도 염치 없지만 잘 부탁드릴게요. 🙂

 

맺음말

파이더맨을 번역했다는 건 제게 의미가 정말 커요. 극장 번역가로 데뷔하기 전 케이블 번역만 할 때, 2008년, 2009년쯤인가 번역가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그런 말이 오간 적 있어요. “솔직히 스파이더맨 공짜로 번역해달라고 하면 안 할 거냐?” 개봉관 번역엔 관심 없다고 말하는 번역가가 있어서 거짓말하지 말라고 다른 친구가 농담처럼 했던 말인데 왜인지 저는 저 말이 뇌리에 박혔어요. 당시엔 극장 영화 번역 같은 건 그저 꿈이었거든요.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 같은 꿈. 피차 이루어질 리가 없다는 걸 아니까 저런 말도 쉽게 했던 거죠. 저런 말에서 인용할 정도로 스파이더맨 무비는 제게 블록버스터로서의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인지 상상만 하던 뭔가를 이뤘다 싶은 남 모를 성취감도 있고요. 한걸음 한걸음 걸어서 드디어 손에 슬쩍 닿을 정도까진 왔구나 하는 스스로에게 주는 칭찬과 다독임 같은. 좋은 기회를 주신 소니픽쳐스에 감사드리고 미흡한 자막에도 좋은 말씀 건네주신 관객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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