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쟁이 번역가 - #쌍욕주의 - 영화번역가 황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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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쟁이 번역가 – #쌍욕주의

욕쟁이 번역가 – #쌍욕주의

청불 영화 자막에서 씨발, 좆이 나오면 백퍼 황석희 자막이다.
- 어딘가에서 본 댓글 중에서

불 영화엔 비속어가 자주 등장한다. 가장 흔하게는 fxxx, shit, motherfxxxxx 같은 것들이 있고 영화에 따라서는 별의별 창조적인 욕이 다 튀어나온다. 그런데 자막에서 적나라하게 욕을 쓰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여기서 말하는 적나라한 욕이라는 건 ‘개자식, 망할놈, 나쁜년’ 정도의 욕이 아니라 ‘씨발, 좆, 개새끼’ 같은 노골적인 욕이다. 자막에서 이런 욕을 본 적이 거의 없을 것이다.

케이블 TV 외화 번역을 하던 시절엔 저런 욕설은 당연히 꿈도 못 꿨고, 개봉관 번역을 하게 된 후에도 적나라한 욕을 좀처럼 쓴 적이 없었다. 영화사에서도 불편하게 생각하고 자막에 나오는 욕설을 불편하게 여기는 관객들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지금껏 내가 극장에서 봐온 자막들에 노골적인 욕설이 없었다는 것도 큰 이유였다. 영화 번역에 교본 같은 게 있진 않지만 지금껏 쌓여 온 통념적인 자막의 틀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그 틀을 함부로 건드리기가 어렵다는 거다.

그런데 번역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상욕을 질러버리고 싶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캐릭터들은 온갖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들을 하는데 왜 자막만 늘 ‘젠장, 빌어먹을’로 돌려막기를 해야 하는지. 한국 청불 영화에선 입에 걸레를 물고 있는 캐릭터도 종종 등장하고 흠칫흠칫 놀라는 대사도 쉽게 뱉는데 왜 자막만 몸을 사려야 하나 싶고.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상욕을 한 마디 적어놓고 몇 번을 읽어 보고 도저히 민망하다 싶어 지워버린 예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스스로 채워둔 족쇄가 있다.

 

나마 이런 몸사림이 줄어든 건 <데드풀> 이후부터다. 알다시피 이 영화엔 ‘씨발, 좆, 딸친다’와 같은 A급 비속어 자막이 판을 친다. 지금도 이런 표현들을 용인해 준 20세기 폭스의 대담함에 놀랄 때가 있다. 나야 개봉관 번역 경험이 변변찮던 루키라 겁 없이 질렀다고 하지만 그걸 그대로 받아주리라곤 생각을 못 했으니까. 20세기 폭스의 외화 자막 사상 저런 노골적인 욕이 들어간 자막은 최초라고 하셨다. 짐작건대 20세기 폭스의 외화만이 아니라 지금껏 저 정도의 날(?)욕이 그대로 자막에 실린 영화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영화제 자막은 논외로 하겠다. – 영화제 자막은 오히려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편이다.

다행히 영화의 성적이 비교적 좋게 나온 덕에 그 후론 청불 영화 자막에서 노골적인 욕설을 쓰는 것이 전보다는 수월해졌다. 욕설 자막에 대한 관객들과 영화사의 반감도 예전과 비교해 훨씬 적어졌다는 게 와닿을 정도로 느껴지기도 하고. 자제력 없이 자막에 욕설을 마구 쓰는 것은 아니지만 전보다 표현의 선택지가 늘어났다는 것은 사실이다.

비슷한 예로, 욕설은 아니지만 ‘자지, 보지’처럼 성기를 지칭하는 용어 또한 자막에 그대로 나오면 관객이 당혹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나와야 할 곳에 나오지  않으면 더 허접한 자막이 되고 만다. 최근 개봉한 <문라이트>엔 이런 자막이 있다.

 

자지 질식하겠다

(Nigga nuts must be chokin’ in those!)

 

학교에서 불량배들이 주인공 샤이론을 괴롭히는 장면에서 나오는 대사다. 샤이론이 꼭 끼는 바지를 입었다며 놀리고 있다. 아마 그 녀석들은 샤이론이 게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던 것 같다. 통상 이런 경우 ‘거시기, 꼬추’ 등등으로 자막을 어설프게 순화한다. 나도 지금껏 그렇게 써왔고 이 자막도 어지간히 고민을 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거친 십대 사내녀석들이 꼬추, 거시기 등의 말을 쓴다는 게 우습게 보여서 보통 십대 사내녀석들이 쓰듯이 ‘자지’라는 말을 그대로 썼다. 청불 영화도 아니고 15세 관람가 자막에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성기를 지칭하는 것도 아주 드물지만 억지로 순화하느니 이 표현이 훨씬 자연스럽다. – ‘nuts’는 불알을 말하지만 한국은 성기를 가지고 농을 건넬 땐 불알보다 성기 그 자체를 지칭하며 놀리는 경우가 많아서 자막을 이런 식으로 썼다. 영어권에선 자지(cock, dick)보다 불알(nuts)이나 엉덩이(butt)가 들어간  농담이 훨씬 많다.

 

렇게 전보다 노골적인 자막을 쓰면 선택지도 늘어나고 표현의 자연스러움도 살릴 수 있지만 과하면 오히려 독이 된다. 내가 뒤져본 표본으로만 평가하자면 드디어 청불다운 자막을 본다고 긍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이렇게 불편해하는 관객도 있는 게 사실이다. <데드풀> 때는 아래와 같은 평도 봤다.

무슨 비속어를 그렇게 적나라하게 쓰는지 저 번역가 자막을 보면 민망할 지경이다.
자막을 저렇게 욕 범벅으로 추잡하게 쓰다니 번역가 인성이 쓰레기다.

 

내가 욕을 한 게 아니라 데드풀이 하는 욕을 자막으로 적은 것뿐이기 때문에 내 인성이 아니라 데드풀의 인성이 쓰레기라고 봐주면 좋겠지만 – 난 일상생활에서 비속어를 안 쓰다시피 하는 사람이다 – 이렇게 자막에서 적나라한 욕설을 접하는 게 어색하고 불편한 관객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니 그 선을 어디로 잡아야 하는지도 굉장히 중요하고 앞으로도 계속 고민해야 할 문제다. 그 선을 앞으로 밀지, 뒤로 당길지는 경력이 쌓이면서 조정하겠지만 지금 내가 그어둔 선은 분명 존재한다. 지금은 내 소신으로 그은 선에 따라 자막을 쓸 뿐이다.

물론 욕이 등장할 때마다 자막에 적나라한 상욕을 쓰는 것도 아니고 지금도 ‘젠장’과 ‘빌어먹을’에 아주 많은 신세를 지고 있지만, 반드시 노골적으로 써야 한다고 느끼는 순간이 오면 과감하게 쓸 것이고 가능하다면 반대하는 클라이언트도 설득해 보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마음껏 욕쟁이 번역가라 부르시라. 기분 좋은 별명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